주위가 다소 부산해진다. 앞자리의 부하직원들이 책상 위의 서류를정리하느라 바쁘다. 대그룹 계열회사에 근무하는 P차장(36)은 손목시계를 슬쩍 살핀다. 오후 5시다. 퇴근시간이다. 그는 뒤에 앉아있는 상사의 움직임을 살핀다. 아직 서류를 살피고 있다. 5시10분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뒷자리의 상사들에게 인사하고 퇴근한다. 신세대 직장인들이라 그런지 퇴근시간이 정확하다. 물론 그들은 출근시간도 거의 어김이 없다. P차장은 입사초기에 비해 출퇴근의 모습도많이 변했구나하는 생각을 한다.마침내 5시30분. 퇴근해도 뒤통수가 근질근질할 것 같지않다. 서류를 정리하고 가방을 든다. 아직 남아있는 상사 몇몇에게 인사하고황급히 문을 나선다. 문을 나서는 순간 오늘 저녁 집에서 해야할일이 머리를 꽉 채운다. 프로젝트의 내용을 파악한 뒤 주말에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방향설정을 계약회사 사장 앞에서 브리핑하기로한 약속이 발걸음을 재촉한다.P차장은 요즘 중소기업들이 손을 뻗치는 중간간부 직장인들중 한사람이다. 그는 그룹기획실에서 기획업무를 하던 신입사원시절 동구와 옛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주화물결과 중국의 시장개방을 맞았다. 거의 10년간 사회주의국가 진출을 위한 그룹차원의 프로젝트를 담당해온 덕분에 현재는 사회주의 국가시장동향에 대해선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베테랑이다. 이같은 배경 때문에 동기들에 비해 빨리 차장으로 진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업무가 바뀐 요즘 그는자신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제2의 직장일로 매우 바쁘게 보내고있다. 다름아닌 중국에 진출하려는 중소기업과 계약을 맺고 중국진출 프로젝트를 짜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것.회사가 정한 기한 내에 중국시장의 시장분석과 타당성조사를 마친뒤 영업활동을 개시하는데까지 책임지는 게 계약조건이다. 여기에는 근무시간이나 출퇴근 따위 등 까다로운 근무조건이 따르지 않는다. 다만 사장과 업무진행과정을 확인, 협의하기 위한 토요일의 미팅시간만 가지면 된다.◆ 조기퇴직 등 미래에 대한 불안감 커「제2의 직장을 잡아라」. 일부 직장인들의 발걸음을 한층 빠르게만드는 구절이다. 중소기업들의 신규사업확대와 산업재편과정에서일고있는 전문인력 수요증가를 계기로 「제2의 직장 찾기」 붐이직장인들 사이에 조용히 일고 있다. 최근 개인의 시간을 존중하는기업풍토가 조성되고 경영혁신이란 기치 아래 펼쳐지는 조기퇴직등 직장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는 것도 이중직업을 갖게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이들 직장인들은 안정적인 수입원인 현재의 직장을 다니면서 이미습득한 업무지식을 그대로 이용, 일하는 시간에 비해 소득도 훨씬높은 제2의 직장을 구하려 하고 있다. 새로운 경험을 쌓아 불안한장래를 대비한다는 계산도 이들 신세대 직장인들을 제2의 직장으로눈을 돌리게 하는 요인이다.제2의 직장은 현재의 직장업무와 직접 관련없는 부업에서부터 기존의 지식과 인맥을 바탕으로 별도 회사설립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견간부 직장인들은 그들의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시간만 내면 업무를 즉각 처리할 수 있는 중소기업체를 대상으로 제2의 직장을 선택하는 새로운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이들 중간간부 직장인들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린 창업 대신 안전하면서도 잡무에 시달리지 않는 제2의 직장을 선호한다. 낮에는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다닌다. 퇴근 후엔 또다른직장에서 파트타임이나 일괄적인 프로젝트계약을 맺고 전문적인 자신의 노하우를 살려 업무를 처리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직장내에서 또다른 직장에 다닌다는 소문이 나면 인사상 좋을 게 없다는 점을 의식, 각자 독자적인 채널을 통해 은밀히 제2의 직장을물색하고 있다.소규모사업의 창업과 중소기업에 대한 경영컨설팅을 해주는Y사장(40). 그는 4명의 정규직원을 두고 기업활동과 관련된 각종상담를 해주고있다. 이만한 인원들을 가지고는 아무리 열심히 일에매달려도 일상적인 업무처리와 각종자료를 수집하는데 급급하다.임금수준이 높아 인원을 충원하기도 어렵다. 동종업체들과의 경쟁이 치열하고 일의 성격이 고도의 전문지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이런 상황에서 그가 생각해낸 것이 그동안 주변에서 알고 지내던전문직 직장인들을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그는 컨설팅에 필요한30여명의 전문가들과 항상 유대관계를 맺고 프로젝트마다 필요한인원을 선발한다. 보수는 보통 직장급여의 1.5배 수준으로 출발하며 시간에 쫓기면 배정도까지 올려준다. 개인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실적이 많아지면서 개인의 주가도 상승한다.◆ 업체, 비밀유지위해 직장인 선호물론 중소기업들은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전문회사에 용역을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직장인을 이용하는 것이 용역의뢰내용이동종업계에 비밀노출 위험이 없는데다 비용이 절대적으로 적게 든다. 용역을 받은 직장인은 인사상 불이익을 우려해 자신의 업무활동을 은밀히 진행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이론보다는 현장에서 익힌실무경험을 중시하는 기업들의 성향도 직장인들을 활용하는 요소로작용한다.비교적 싼 비용으로 전문가를 쓰려는 중소기업들과 자신의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고소득을 올리려는 전문직 직장인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직장인들의 제2직장 업무영역도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어느 기업이든 항상 필요한 법무 세금 컴퓨터업무는 물론 신규사업기획 해외진출 금융 등 보다 전문적인 분야에 이르기까지 수요가다양하다. 특히 대기업에서 해당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이들 직장인들은 세분화된 운영시스템 속에서 활동해온 까닭에 자격증을 소지한 회계사 세무사 변호사 등 전문가들 못지않게 일을 매끄럽게 처리해낸다. 비용도 상대적으로 싼 것은 물론이다.자신의 업무와 관련해 아예 사업을 벌이는 직장인들도 있다. 자동차판매영업을 하고 있는 K과장(38)이 한 예다. 그는 자동차영업전선에서만 꼬박 10년 동안 뛰어 과장으로 승진했다. 자동차회사간의판매망 확보전 덕분에 그는 과장이란 직책을 가지고 한 지점의 장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소단위의 사업체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거래처나 잠재고객들을 대접할 일이 많아지자 아예 카페를 차린 것. 평소 다른 자동차회사 영업부서에 근무하는 동료들과 정기적으로 만나온터라 이들 5명과 일정비율로 투자,함께 운영하고 있다. 지점장이 되면서 접대비의 규모가 점차 커질뿐 아니라 동료들도 어차피 해야할 접대를 자신들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할 경우 고정적인 매출이 보장될 수 있다고 계산했다. 카페운영은 종업원을 두고하며 출자한 동료들끼리 순번을 정해 하루의 영업성과를 결산하는 방식을 취하고있다. K과장은 값도 다른 곳보다저렴할 뿐만 아니라 안심하고 접대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따라서 회사측으로서도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이익이라고 주장한다.물론 개인적으론 금전적인 이득과 함께 경영의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또다른 장점이 있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 또다른 일을 벌이고있다는 점에서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어 직장내 업무도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되는 것같다고 털어놓는다.다소 고전적이지만 신도시를 중심으로 아내와 함께 부업에 나서는직장인들도 많다. 대그룹 계열사에 근무하는 H과장(34)은 최근 분당에서 체인음식점을 차렸다. 자신과 아내 모두 사업의 경험이 없는데다 체인본점에서 재료 일체를 대주어 독자적으로 장사를 하는것보다 손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낮에는 아내가 일을 하고 저녁에는 자신이 일찍 퇴근, 곧바로 제2의 삶의 터전으로 향한다. 그는상가 주위의 많은 매장들이 소위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직장인들이많다고 말한다. 부업을 가진 이들 직장인은 저녁 늦게까지 매장을뒷정리한 후 하루의 결과를 정산하고 아내와 함께 전반적인 경영상태에 대해 검토한다. 그러나 아무리 소규모 점포라도 알지못하는수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이때 가장 힘이 되는 지원자는직장내 동료들이다. 해당분야의 동료를 찾아가 자문을 구한다.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선 비슷한 처지의 다른 동료에게도 어드바이스를 해주고 자신도 자기가 필요로하는 분야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방식을 취한다. 이들은 서로 자신의 분야에선 전문가이기 때문에비용을 들이지 않고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금이나 경리분야는 경리담당 동료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아주 초보적인 장부기입법에서부터 세금을 절약하는 방법에 관한 자문에 이르기까지매우 다양하다. 부업으로 하는 자영업일 경우에는 초보적인 문제들이 대부분이라서 별도의 시간을 내지 않고서도 충분한 자문을 받을수 있다.◆ 여가이용 … 일의 연속성 유지에 도움이중직업을 갖는 직장인들의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렵다. 부업을 해도 사실을 숨기거나 인맥을 통해 별도의 아르바이트를 은밀히구해 거의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직 직장인들의 아르바이트를 알선해 주는 업체들을 통해 그 열기를 충분히 가늠할수 있다.전문인력 대여업체인 (주)프리랜서의 이민권사장(40)은 현재 가입회원수가 2천명을 넘어섰다고 말한다. 하루에도 5건 내지 7건정도의 회원문의 전화가 들어오고 있다. 이들중 70%정도가 대리 과장차장 부장 등 중견간부 직장인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일정한 자격기준을 통과한 이들 회원들의 업무도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 경영 무역 회계 컴퓨터관련 업무는 물론 출판서비스 디자인 건축 인테리어 이벤트 광고 영상 방송 문화 예술에 이르기까지거의 전문직 전분야에 걸쳐있다. 이사장은 직장인들이 제2의 직장을 가지는 것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의 여가시간을 쪼개어 부업을 하면 그만큼 일의 연속성을 유지할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제2의 직장이 대부분 상황이 어려운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현재의 자기 직장을 중시하는 마음이 생겨난다고한다.◆ 생계유지 자구책그는 이처럼 직장인들이 또다른 직장을 가지려는 것은 개인의 삶을중시하는 의식변화와 함께 기업환경의 변화가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개성화, 사회의 다원화 등 사회적 환경도 큰몫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직장에 대한 불안과 기운이 왕성한 시기에 경제적 여유를 확보해야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좀더 설득력을 갖는다. 최근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전문커피점의 상당수가 과장급 이상의 대기업 직장인들이 실소유주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실제로 이들 직장인은 생계유지보장을 위한 자구책이라고 말한다.업무중 과로로 인해 상해를 당해도 퇴직금과 함께 위로금조로 기껏1천만원내지 3천만원 정도밖에 지급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명한(?)이들 신세대 간부직장인은 어리석게 보이는 선배나 상사의 전철을밟지않겠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경영혁신이다 세계화다 하면서 명예퇴직이라는 이름 아래 언제 해고될지 모르고 해고는 되지 않더라도 능력급을 내세우며 하급자를상사로 모시는 상황이 나에게도 닥치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기업내부에서는 인사적체로 인해 올라갈 희망이 점점 희박해지면서 자신의 삶이라도 찾자는 의식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현재 삼성의 경우 과장에서 차장으로 올라가는데 최소 6년이 걸린다. 과장연한이 길어지면서 과장도 갑과장 을과장 병과장으로 나뉜다. 인사정체에 따라 다른 직급들도 점차 길어져 이제 과장으로 퇴직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승진에 대한 스트레스가 항상 직장인들의 머리를 짓누르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아예 중도부터 승진을 꿈꾸지 않는 사원도 많아졌다. 10년전만하더라도 동료들 간에이사도 못될 사원이 간혹 사장을 하겠다고 호언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최근에는 이런 신입사원은 찾아보기 어렵다.제2직장을 구하려는 직장인들이 늘면서 소위 헤드헌터 등 인력알선업체들도 기존의 단순한 노동인력이나 전문경영인의 알선에서 고도전문지식을 갖춘 중견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직장인 인력파견 및 알선시장에 적극 나서고 있다. 또한 내년부터 인재파견업이 어떤 형태로든 법적으로 보장될 예정이어서 전문지식을 갖춘 중견간부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제2의 직장 찾기는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