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돈을 받으러 가는 날이 왔다. 이선용 태창금속사장은 새벽4시반 도시락을 챙겨 자가용지프를 타고 전방으로 향했다. 81년말전방 군부대에 막사개선 및 온풍기공사를 해주고 4천만원의 대금을타러나서는 길이었다. 그러나 막상 대금지급처인 철원군 농협에 도착해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농협에서 공사대금 4천1백만원 전액을 1천원권으로 내놓는게 아닌가. 당시만해도 1만원짜리가 귀해 시골농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이사장은 부랴부랴 인근농가에서 빈종이부대를 구해 천원짜리 41개 다발을 꽉꽉 눌러 담았다. 무려6부대였다.무척 무거웠으나 첫 공사를 현금으로 받아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았다. 지프 뒷좌석에 돈보따리를 싣고 휘파람을 불며 차를 몰았다.더욱 상쾌한 것은 며칠전 양구 연천전곡 등 전방지역 17개 사단의부대 막사개선공사를 대부분 따냈기 때문이다.비포장도로를 달리자 돈보따리가 찢겨져 돈이 날리기도 했다. 아무리 일찍 나서도 전방에서 수금을 해오면 은행이 문을 닫은 뒤여서돈보따리를 서울 미아리에 있는 집 안방에다 놓고 돈에 파묻혀 잠을 자야했다.이렇게 천원짜리 돈보따리를 나르는 일이 3년간 계속됐다. 저녁 늦게 제일은행지점에 입금하는 날은 여직원들이 돈을 세느라 퇴근도못해 미안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어느 하루도 돈부대가 무겁게느껴진 적은 없었다. 장사가 잘됐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이처럼 돈부대에 걸터앉아 땀을 닦는 즐거움이 어느 날부터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다.첫징조가 나타난 것은 84년 9월1일 화천 부대막사신축을 위해 판유리를 실은 11t트럭이 화천고개에서 굴러버린 일이었다. 홍수가 져길이 미끄러운 탓이었다.이 홍수는 1주일간 계속됐다. 이바람에 조경사업을 위해 청평댐 아래 심어둔 회양목 2백만그루가 물에 떠내려 갔다. 30년간 물에 잠긴 적이 없는 지역에 심어놓은 나무가 잠겨버린 것이다. 물이 빠진뒤 새벽부터 달려가보았지만 푸르던 수목원은 질퍽한 모래사장으로변한 뒤였다.◆ 8년전엔 돈에 묻혀 잠자기도사고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사장은『당시엔 머피의 법칙과도미노이론이 겹친 상황이었다』고 술회한다.홍수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 건자재를 납품받아간 업체가 부도를 당했다. 충북 충주에 시장상가 복합빌딩을 짓는 남운건설에 건자재를납품했는데 이 회사가 상가분양이 안되자 부도를 내고 만 것이다.여기서부터 자금줄이 삐걱이기 시작했다 .이런 시기에 다시 엄청난사건이 터졌다. 인천에 아파트관리업체를 설립하면서 동료에게 지사를 맡겨놓았는데 그가 본사 몰래 철근장사를 하면서 부도를 내고만것이다. 인천지사에서 발행한 어음에 배서를 한 것이 실수였다.자고 나면 터지는 사고로 3억원에 달하는 부도수표만 거머쥐게 됐다. 갑자기 들이닥친 3억원의 빚을 갚아낼 일이 아득했다.더이상 사업을 할 의욕까지 사라져 갔다. 그럼에도 일단 빚은 갚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직접 부도를 내 적색사업자가 되면 나중에는 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그가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은 85년 5월, 당시 태창금속 전신인 항진실업은 서울 무교동 김성진내과 6층 601호에서 603호까지60평의 사무실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가 기울자 임대료를 낼돈조차 없어진 것이다. 사무실을 이 건물 13층 옥상에 있는 천막사무실로 이전했다. 이사장은 옥상으로 쫓겨가던 날을 아직도 잊지못한다.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따르던 몇몇 직원만 남아 책상과 캐비닛을 등에 지고 옮겼다.◆ 3억부도, 빚갚고나니 알거지대부분의 기업인들이 사업을 청산하기로 마음먹으면 빚갚는 일보다앞으로의 생활비를 챙기는데 힘을 쏟는다. 그러나 그는 빚을 갚는일은 사업을 하는일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라는 신념으로 빚갚는 일에 열중했다. 무엇을 하더라도 빚부터 갚은 뒤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천막사무실로 이전한 그는 1년간 군납일을 계속하며 빚을 갚아나갔다. 86년초 그는 드디어 금호그룹에 6천만원의 돈을 갚는 것으로빚청산을 끝냈다. 이 마지막 빚을 갚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허탈한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왠지 눈물이 앞을 가렸다.77년 외국어대를 다니다 군에 입대해 제대를 한 뒤 해수욕장 콜라장사를 시작으로 해보지 않은 고생이 없는데 지금 남은 것은 완벽한 빈손뿐이었다. 콜라장사에서 번돈으로 부친의 친구로부터 항진실업을 인수, 영등포지하상가의 물탱크공사를 시작할 때만해도 꿈에 부풀어 있었다.『이제 나도 기업인이다』라는 자부심 하나로 물탱크공사를 끝내고에폭시코팅공사를 하면서 냄새에 중독돼 몇번씩 쓰러지면서도 기업을 키워보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했다.생판 모르는 정우건설을 찾아가 공사하청을 주지 않으면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며 1주일동안 떼를 써서 반월공단의 명화금속공장건설하청을 받을 만큼 용기에 차있었다.『그러나 지금 나는 무엇인가. 그렇게 애를 썼던 일들이 빈털터리가 된 지금 다 무슨 소용이 있나.』 그는 심한 회오에 빠졌다. 그래도 한가닥 나아진 것이 있었다. 『아, 이젠 자유다』라는 것이었다.그랬다 빚쟁이에게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그 설움을 알지 못한다. 부도를 내고 「쇠고랑」차는 것이 훨씬 편할 것같다는 생각을수없이 한다. 이때 이사장은 결국 자유를 얻긴 했지만 정말 수중에단한푼도 없는 알거지가 됐다. 집도 회사도 다 날린 상태였다.딱 한가지 희망이 있다면 2년전에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 빌려준 돈이었다. 액수는 2천5백만원. 이사장이 기업을 경영하고 있을 땐2천5백만원이 큰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집도 절도 사라진 이때는단 한푼이라도 받아내야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 그 친구도 사업이 어려워 돈을 받기는 힘든 처지였다. 『이제 내돈 내놔라.』 그는 매일 친구를 찾아가 다그쳤다. 친구는 지금은 갚을 여력이 없다며 시간을 달라고 매달렸다. 그는 여유를 주지 않고2천5백만원을 어디다 썼는지라도 밝히라고 재촉했다. 그 친구로부터 아연도금을 하는 사람에게 2천5백만원 전부를 빌려주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돈을 받기 위해 친구와 함께 부천시 도당동 반도스포츠 앞에 있는 그 아연공장을 찾았다. 대원기업이란 이름의아연도금공장을 찾아 돈을 갚아줄 것을 거듭 요구했다. 그렇지만도금공장사장도 『지금은 돈이 없다』며 회피할 뿐이었다.솥뚜껑보다 조금 큰 아연로에서 각종 강관류를 도금하고 있는 사장은 꼭 돈을 받아가고 싶으면 이 공장을 인수해가라며 버텼다. 막상공장을 둘러보니 세로 60㎝에 가로 4m의 작은 용융로가 전부인 무허가 천막공장이었다. 이 공장으로는 3개월도 안돼 망할 것 같았다. 『이 따위 무허가공장을 인수하라』니 턱도 없는 얘기라는생각만 들었다. 이제 돈을 받을 길도 막연했다.부천 아연공장을 다녀온 뒤 1주일간 밤잠 자지 않으며 고심했다.1주일만에 이사장은 생각을 바꾸었다. 이를 악물었다.『그래, 사업을 다시 시작해보자. 이게 운명인지도 모른다』며 8일째 되던날, 그는 부천으로 내려가 2천5백만원의 빚 대신 「하꼬방」공장을 정식으로 인수하기로 도장을 찍었다. 지금 이사장이 인수한 도금공장은 태창금속으로 이름을 바꿔 국내 최대의 용융아연 도금업체가 됐다. 태창금속은 현재 인천시 남동공단 10블록 17블록22블록 등 3곳에 대형공장을 가지고 있다.제1공장은 아연용융도금공장으로 강관등을 도금, 부산파이프 등 국내 대기업에 납품한다. 이 공장은 첨단 완전 전산화된 설비로 24시간 풀가동을 해도 밀리는 주문을 감당하기 어렵다. 국내에서 유일한 설비를 갖추고 있어서다. 고속철도 참여업체인 이 회사는 제2공장에선 첨단 방음벽을 생산하고 제3공장에서는 도로구조물을 제조한다.이사장은 3개공장을 이렇게 첨단공장으로 일궈놓은 데는 『지난날의 어려움이 큰 도움이 됐다』고 밝힌다. 8년전 폐업을 하던 순간을 생각하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용기가 솟아오른다고 힘주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