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본 경험이 있을 법한 단어다.흔히 「큰부자는 하늘이 내린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스스로 삶을 개척하면서 부를 축적한 재벌이 있는가 하면 핏줄을 잘타고난 신흥재벌도 있다.전자가 자수성가형 창업재벌이라면 후자는 선대가 이룩한 부를 물려받은 기본적 바탕 위에서 출발해 나름대로 부를 확대 재생산해나가는 세습형 분가재벌이라고 할 수 있다.자수성가형이든 세습형이든 「큰 부자」소리를 듣는 신흥 재벌총수들의 면면을 보면 각자의 인생이력이나 경영관등이 천차만별이다.◆ 창업형 신흥재벌맨주먹 하나로 굴지의 기업군을 일구고 여전히 사업을 확장시켜 「재벌」이란 소리를 듣는 입지전적인 인물들이 있다. 바로 자수성가한 창업 신흥재벌들이다. 그들은 기업을 일으킨 후부터 수성과 확장의 순환로에서 아낌없이 자신을 내던지며 살아온 억척인생들이다.그들이 일으키는 태풍에 재계는 놀라움과 시샘을 드러내기도 한다.신흥재벌들을 보고 재계에서는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로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견제도 만만찮다. 그러나 맨손으로 기업군을 일궈낸 경륜의 신진기업가들은 다시금 도전과 응전의 뜨거운 혈기로팔뚝의 힘줄이 실룩거리기도 한다.창업형 신흥그룹의 총수들은 기존 대재벌의 창업주들과는 여러 면에서 확연하게 다르다. 그들에 비해 정경유착이란 단어의 때를 타지 않았고 마구잡이로 확장에만 전력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국민들에게 신선도면에서 높은 점수를 유지하고 있다. 또 새로운 계열기업을 직접 세우는 것보다 M&A(인수합병)를 통한 기업확장과 관리로사세를 불리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아울러 오직 성실과 끈기 배짱 탱크같은 추진력 등 경영자적 자질과 메맨손?으로 대표되는 강인한 생명력이 그들이 오늘을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최근 주목받고있는 신흥재벌총수로는 나승렬회장을 들 수 있다. 지난해 10월 국내 굴지의 기업인 포철로부터 포스코켐을 인수하면서대한중석 인수이후 다시 뜨거운 조명을 받은 거평그룹의 총수다.인생역정을 살펴보면 「인간승리」라는 타이틀이 붙어도 좋을 것같은 나회장은 45년 전남 나주군 문평면 북동리에서 3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빈농의 아들이라 국민학교로 정규교육과정을 마친 나회장은 부모의 농삿일을 돕다가 가난이 싫어 무작정 고향을 떠난다.◆ 거평 나산 신원 등 도전과 응전의 ‘인간승리’서울에 정착한 나회장은 재일교포들이 출자해 만든 회사로 흑백TV브라운관을 만들던 한국전자와 롯데삼강에서 직장생활을 한다. 그러나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낀 나회장은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사업의 꿈을 불태운다.직장생활 10년동안 모은 전재산인 5천만원을 갖고 뛰어든 첫 사업은 제약업. 하지만 사기를 당해 돈 3천만원을 고스란히 날리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절치부심한 나회장은 집장사로 다시금 사업에나선다. 고향 나주의 옛이름을 딴 「금성주택」이란 간판을 걸고연립주택을 지어 파는 일을 벌였다. 80년대 초 경기위축으로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경기가 호전되면서 좋은 부지를 물색한 뒤 건설업체에 공사를 맡기는 「기획건설업」이란 방식으로 나회장은 사업을 번창시킨다.자본축적을 이룬 나회장은 부동산경기가 정점에 달한 89∼90년초에서초동에 센츄리오피스텔을 지어 분양하면서 큰돈을 만진다. 이것이 오늘의 거평을 만든 기초가 된다. 아울러 현재 거평그룹본사가위치한 논현동에 26층짜리 복합건물을 짓고 상호를 (주)거평으로바꾼다. 거평이란 이름 역시 고향 나주의 옛지명이다.이후 나회장은 「탈부동산」을 선언하면서 본격적인 몸집부풀리기에 나선다. 94년 2월 나회장은 재계에 충격적인 「신고식」을 치른다. 바로 대한중석을 인수한 것이다.「새우가 고래를 먹었다」는 말이 생겼다. 이 일을 계기 나회장은제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3개월 뒤 나회장은 라이프유통을인수한다. 이어 필립스계열사인 시그네틱스코리아, 포철계열의 포스코켐 등 굵직굵직한 기업들을 연달아 인수하면서 재벌대열에 합류하게 된다.거평그룹은 재계에서 「리틀삼성」으로 통한다. 지난 94년 4월 삼성전자 부사장출신의 양수제 대한중석사장등 대표이사 3명과 임원6명을 모두 삼성출신으로 선임한데다 조직·관리면에서도 삼성그룹을 닮아가려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지금도 웬만한 계산은 암산으로 처리하며 전자계산기보다 주판을사용하는 나회장은 술자리에서 메목포의 눈물?을 애창한다.나회장을 최측근에서 보좌하고 있는 인물로 나선주 건설부문사장과박석종부회장을 꼽는다. 두사람 모두 나회장의 친인척이다. 나사장은 나회장의 장조카로 연세대 법대를 나와 현대에서 근무하다 나산으로 자리를 옮긴 뒤 그룹기조실장 거평사장을 거쳤다. 박부회장은나회장의 처남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신문기자출신으로 미국메트로폴리스 부동산회사사장을 하다 거평에 합류, 거평건설과 거평의 사장을 역임했다.이밖에 삼성출신 사장과 임원들도 조직에 새 바람을 불어넣으며 거평의 변신과 적응을 조율하고 있다.「한국의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기업인」이자 「패션왕」으로 홍콩에서 발행되는 경제지인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에 소개됐던안병균회장. 또 다른 신흥재벌의 주역이다.「무에서 유를 창조한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란 평을 듣는 안회장은 전남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에서 10남매중 여섯째로 태어났다.광주서중 입학 3개월만에 학비때문에 그만둔 안회장은 고향서 농삿일을 하다상경을 결심, 18살때인 66년 무작정 서울행열차에 몸을 싣는다. 당시 안회장의 수중에 있던 돈은 단돈 2천7백원. 그후 안회장이 거친직업만도 구두닦이 미장공보조 자장면배달원 연극단역배우등 「직업순례기」처럼 다양하다.음식업으로 번돈을 화재로 일순간에 날리기도 했으나 「오뚝이」안회장은 후원자들에게 지원도 받고 사채도 끌어들여 75년 명동에「마이하우스」라는 극장식식당을 개업해 재기한다. 이후 시경옆「초원의 집」과 종로 화신백화점뒤의 「무랑루즈」라는 극장식 술집을 차려 사업자금을 마련한다.목돈을 만든 안회장은 종로5가에 의류도매센터를 차리면서 「술집주인」에서 사업가로 변신한다. 광고에 힘입어 하루 매출이 1억원이 넘을 정도로 의류도매센터는 대성공을 거두고 사들인 부동산값도 엄청나게 올라 안회장은 직접 의류제조업에 참여하게 된다.◆ 7전8기의 오뚝이 안병균 회장처음 주니어복에 손댔으나 고전했던 안회장은 「조이너스」란 독자적인 브랜드를 내걸고 숙녀복으로 방향을 돌린다. 「조이너스」는빅히트해 나중에 개발된 「꼼빠니아」와 함께 나산의 효자상품으로자리를 잡았고 지난 94년에는 단일브랜드로 1천억원 매출을 돌파한다.조이너스의 성공이후 안회장의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달았다. 의류에서 건설 관광 레저 유통업으로 무섭게 사업영토를 넓혀나갔다. 그결과 지난 89년도분 소득납세자중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안회장의 「세금경영론」이 드러난 것이다.기업에 대한 평가는 외형이나 업종보다는 얼마나 성실히 세금을 냈느냐가 척도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안회장의 지론이다.나산의 사세확장과 더블어 안회장의 캠프에도 전문경영인들이 자리를 잡고 안회장을 보좌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그룹 부회장과 건설대표를 맡고 있는 송세창씨다.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송부회장은 삼성비서실장과 삼성물산·석유화학·전관·항공등의 사장직을 두루 거친 전문경영인이다. 나산마트 사장을 거쳐 지난해에나산실업사장으로 자리를 바꾼 안종표사장도 안회장의 측근에 속한다.광주고를 졸업하고 국세청과 덕수종합개발에 근무하다 84년 나산실업에 입사, 나회장과 10여년간 동고동락해 왔다. 현재 나산그룹에서 유학을 보낸 이현종 전 나산실업사장도 귀국하면 중용될 것이확실시되는 실세측근에 속한다.이밖에 안회장의 친동생으로 나산건설 전무를 거쳐 현재 나산그룹의 언론·광고관계를 총괄하는 냅스의 안병호사장은 안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인물이다.세계 스웨터시장 점유율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주)신원도 잘 나가는 신흥재벌이다. 「에벤에셀」 「씨」등의 숙녀복을 만들면서 나산과 함께 국내 숙녀복업계의 정상다툼을 벌이고 있는 기업이기도하다.옷장사는 휴일판매량이 평일의 3배가량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주일은 쉽니다』를 내걸면서도 신원은 의류업계정상을 다투고 있다. 보편적인 기준으로 보면 신원의 영업방침은 분명히 「이단」에속한다. 그러나 11개 계열사를 거느린 신원그룹의 박성철회장은 재계에서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소문난 총수다.『믿음이 지나쳐 때로는 기업을 하는 건지 선교를 하는 건지 구분이 안될 때도 있다』는 한 직원의 말처럼 박회장은 독특한 개성과경영철학으로 무장돼 있다.신원을 주목받는 신흥그룹으로 키워낸 박회장도 어려운 환경에서자신을 꾸준히 계발하면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기업가에 속한다.40년 6월 섬많기로 이름난 전남 신안에서 태어난 박회장은 전쟁으로 집이 파산, 국민학교를 3학년까지 마치고 중도에 그만두게 된다. 학교중퇴후 남의 집일을 다니다 공부에 대한 욕심때문에 박회장은 고아원으로 잘못 알려진 「중앙감화원」에 들어가 죽을 고생을 한다. 그곳에서 박회장은 당시 파견나온 보사부공무원의 말에자극받아 신앙을 접하게 된다.이후 박회장은 고려대에 입학, 적만 걸어놓은 채 산업경제신문에서교열기자로 일을 하게 된다. 이후 경제부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기자생활을 시작한 박회장은 정치부에서 국회출입기자로 활동하기도 한다. 특히 경제부에서 섬유를 담당하면서 쌓은 지식은 훗날 박회장의 사업에 밑거름이 됐다.73년 박회장은 장인이 운영하던 스웨터 제조업체인 신원통상을 넘겨받아 사업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 신원통상은 종업원 4∼5명에 편직기 12대의 빈곤한 수공업체였으나 오늘날 신원그룹의 모태가 된다.◆ 신원의 고속성장 비결은 ‘믿음’사업을 시작한 박회장은 3년간 회사의 편직기계밑에서 먹고자며 직접 생산과 판매를 도맡아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스웨터품목에서초고속으로 성장세를 탄 박회장은 87년 수출 1억불 고지에 오르기도 한다. 이후에도 사업은 성장가도를 달려 박회장은 섬유에서 건설 레저등으로 사세를 확장, 재계의 기린아로 떠오르면서 미국 포브스지(Forbes)에 의해 세계 1백대 유망중소기업에 꼽히는 영광을누리기도 한다.신원의 고속성장에 대한 비결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믿음」이다. 사호에 드러나듯 하나님 제품 직원을 향한 믿음이다. 한마디로청교도정신으로 무장한 기업경영이다. 신원의 고정거래선 4백여개사의 대부분이 10∼20년이상 관계를 맺어온 단골손님들인 점에서신원의 우직함이 드러난다. 뚝배기(품질)도 장맛(신뢰감)도 모두갖춘 것이다.신원에는 「부정십계명」이라는 것이 있다. 한마디로 남에게 피해주는 일은 하지 말라는 열가지 계율이다. 그만큼 타이트한 감을 주는 신원그룹이다. 게다가 철저한 고급화전략, 수출위주의 판매전략등도 신원의 성장에 한몫을 했다.모든 면에서 제일을 추구하는 박회장이 「날개」를 다는데 보좌하고 있는 사내인사로는 김상윤 그룹부회장과 김종기 그룹기조실전무이사, 노갑기 신원상무, 송기한 상무, 유은상 신원전무이사등이 있다. 김부회장은 경북대 사범대를 나왔으며 신원통상부사장 신원 대표이사를 역임했다.김종기전무는 성균관대를 나와 삼성전자 동국전자등에서 근무했으며 신원그룹의 사령탑인 기조실에서 박회장을 보좌하고 있다. 송상무는 박회장의 처남으로 자금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은상전무는 연세대를 나와 신원통상에 입사한후 17년간 주로 자금·경리를 맡아온 「자금통」이다.지난해 증권가에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M&A(인수합병)였다. M&A를추진한 많은 기업들 가운데 투자자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이름이있다. 신호그룹의 이순국회장이다.신호그룹은 처음 재벌소리를 듣던 90년만해도 「제지그룹」이었다.계열기업이라고는 신호제지등 9개 기업이 모두 제지회사 일색이었다. 그러나 불과 수년사이에 이회장은 전자 철강 기계 건설 화학금융 에너지등 다방면으로 계열사를 늘리며 무섭게 뻗어나간다.이회장은 신호그룹의 계열사가 모두 부실기업 인수·관리를 통해이뤄졌기에 「기업사냥꾼」이라는 별명을 갖고있다. 또 법정관리업체등 부실기업을 인수한 후 기적처럼 경영을 정상화시켜 「마이더스의 손」 또는 「경영의 귀재」라는 말도 듣는다.이회장은 42년 대구에서 4형제중 셋째로 태어났다. 우방그룹의 이순목회장이 바로 그의 윗형이다. 검정고시로 경북사대부고를 졸업,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이회장은 재학중에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한다.졸업후 이회장은 한국제지에 말단사원으로 입사, 기획관리과장까지거친다. 73년 신호제지의 전신인 삼성특수제지로 옮겨 부사장까지오른 이회장은 77년 부도난 동방팔프(현 온양팔프)를 인수해 3년만에 흑자로 바꿔놓는 경영수완을 보인다. 또 82년 부도난 「누더기기업」 삼성특수제지의 법정대리인이 돼 1년만에 흑자회사로 전환시키기도 한다. 87년에는 이회장 자신의 소유주식 30억원을 종업원앞으로 선뜻 내놓아 직원들을 고무시키기도 한다.법정관리 9년만인 지난 91년 신호제지가 법정관리를 마감하면서 이회장의 「그룹만들기」는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린다. 93년에는 처음으로 신호그룹이란 호칭을 대외적으로 사용하면서 재계에 16개기업을 가진 「알짜재벌」로 「명함」을 올린다.이회장이 자주 애용하는 경영론은 크게 두가지. 하나는 임직원들이열심히 일할 수 있는 멍석만 깔아주면 문제는 해결된다는 「멍석론」이다. 또 하나는 기업은 생명체로 생명체를 죽이는 것은 범죄와같은 것이며 기업의 영속성·안정성을 바탕에 둔 성장과 배분이 있어야 한다는 「기업생명체론」이다.말이 어눌해 「더듬이」라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는 이회장은 직원들과 곧잘 노래방에서 함께 어울리기도 해 직원들로부터 인기가 높다.신호그룹에서 이회장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인물로는 온양팔프시절부터 함께 동고동락해온 김호희 그룹부회장과 전영찬 그룹제지기조실장 겸 부사장이 꼽힌다. 아울러 신호테크를 맡고있는 친동생 이순욱사장도 형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인물로 꼽힌다. 김부회장은 고려대를 졸업한 후 대원제지를 거쳐 온양팔프에서 10여년간 근무해「제지통」으로 통한다.◆ 분가형 신흥재벌자수성가형 신흥재벌에 비하면 아직 연조가 짧고 총수 또는 오너의연륜도 길지 않다. 또 대부분 기존의 재벌그룹에 연이 닿아 기업하기가 자수성가형 그룹보다 쉬울 것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한마디로 「기댈 언덕」이 있다는 소리다.그러나 그들에겐 그런 인식이 부담스럽다. 자칫하면 선대가 이룬업적이나 현재 대그룹을 이끌고 있는 친족들에게 「누」를 끼칠 수있다는 조심성 때문이다.가장 최근에 탄생한 분가형 신흥재벌로 희성그룹을 들 수 있다. 지난해 LG그룹의 대권이 구본무회장에게로 넘어가면서 탄생했다.구본릉회장이 이끌고 있는 희성그룹은 지난 74년 설립돼 땜납 및용접봉업체인 희성금속을 모기업으로 하며 전력선 및 통신선 금속가공 도금재 자동차촉매재 등을 주력사업으로 하고 있다.희성그룹은 출범하자마자 올 매출액을 8천억원으로 잡고 오는2000년에 2조원 매출을 이룬다는 당찬 의욕을 보이며 걸음을 옮기고 있다.희성그룹을 이끌고 있는 지휘관인 구본릉회장은 LG구자경 명예회장의 4남1녀중 차남으로 LG그룹 구본무회장의 바로 아래동생이다.49년생으로 경남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구회장은 75년 럭키금속(현 LG금속)에 입사해 83년까지 미국 시카고지사장으로 근무했다.그 뒤 구회장은 럭금상사 해외관리본부장과 금성통신 수출본부장,금성사(LG전자)전략기획실장 등을 역임하며 경영훈련을 받아왔다.이 때문에 구회장은 해외사업에 밝고 신규 유망사업에 관심이 많은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구회장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부지런함으로 조직을 이끄는 행동파로 합리적이며 새로운 일을 벌이는 적극적인 성격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가칭 새한그룹. 낯선 이름이지만 누구나 집에 갖고 있는 카세트테이프나 비디오테이프를 생산하는 「새한미디어」하면 고개를 끄떡일 것이다. 바로 새한미디어가 주축이 돼 6개 계열사를 한식구로삼아 지난해 출범한 그룹이다.◆ 새한미디어 세원 등 짧은 연륜속 고속성장새한그룹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회장의 차남인 고 이창희씨의 미망인인 이영자회장과 한형수 부회장, 아들인 이재관 새한미디어 사장이 경영을 주도하는 체제로 출범했다.새한미디어는 지난 73년 이창희씨가 삼성그룹과 인연을 끊고 독자적으로 설립한 회사로 처음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로 출범했으나80년 새한미디어로 이름을 바꿨다.88년 충주공장의 화재와 이창희 새한미디어회장의 사망으로 잠시위기를 맞았으나 이후 이영자회장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경영체제를갖춰 오늘의 새한그룹을 일궈냈다.새한그룹의 대권승계자로 가장 눈길을 끌고 있는 이재관사장은 고이창희회장의 장남으로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시티뱅크 서울지점에 근무했다. 91년 3월 새한미디어에 입사해 11월에 사장직에 오른이사장은 29살이란 어린나이에 맡은 기업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재계로부터 「싹수」를 인정받는다. 형제중 가장 경영감각이 뛰어났다는 부친을 닮아서인지 경영감각이 뛰어나고 스케일이 크며 예의바른 인화중심형의 경영인이란 평을 듣고 있다.미원그룹에서 분가한 세원그룹도 떠오르는 신흥재벌로 재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93년 미원그룹에서 분리되자마자 그룹이미지통합(CI) 등을 통해 본격적인 그룹체제로 발진한 세원그룹은 8개계열사를 갖춘 중견그룹으로 자리를 잡았다.현재 세원그룹의 대주주는 임대홍 미원그룹명예회장의 차남인 임성욱 세원전무이며 회장직은 전문경영인출신의 임병학회장이 맡고 있다.세원그룹이 2~3년의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은 것은 임대홍 명예회장의 조언과 임병학 현회장의 공이라는 게 중론이다. 세원그룹의간판인 임병학회장은 임성욱전무의 먼친척으로 알려져있으며 사심없는 경영으로 세원의 성장에 견인차역할을 하고있다는 평을 듣는다. 중앙대 약대를 졸업했으며 지난 69년 입사한 이후 계속 미원그룹을 지켜온 오리지널 「미원맨」이다.이밖에 지난해 6월 1일자로 한일그룹에서 분가한 경남모직도 아직그룹의 형태를 못갖췄지만 「준그룹」이란 소리를 듣고 있다. 경남모직회장을 맡고 있는 김중건회장이 분가때 함께 떨어져 나온 한효개발 한효건설 부국증권의 대주주인데다 경남모직의 자회사들이기때문이다. 그러나 경남모직측은 『그룹은 아니다』라고 부인하고있다.따라서 언제 그룹으로 간판을 걸고 본격적으로 재계에 등장할지가관심이 되고 있다. 물론 주축은 경남모직이다.경남모직회장을 맡고 있는 김중건회장은 고 김한수 한일그룹회장의차남이자 김중원 현 한일그룹회장의 바로 아래동생이다.김회장은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한일합섬 전무, 부국증권고문, 한효개발 부회장, 경남모직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