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강 「레떼」를 건너 과거는 길을 재촉해 사라지고 미래는입을 벌리고 다가 온다. 억겁의 세월이 그랬듯이 낡은 한해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한해가 다시 떠올랐다. 왜 유달리 이새해를 두려운 마음으로 맞고 있는 것일까. 다만 미지의 것에 대한두려움 때문인가. 아니면 세상일 되어가는 모양이 또하나의 예측불허를 예비해 놓고 있기 때문인가. 돌아보면 일년내내 가슴을 콩닥거린 지난 한 해였다. 한국에 산다는 「죄」로, 군부 독재를 살아냈다는 「죄」로, 한강의 부실 기적에 동참해왔다는 「죄」로 우리 모두는 가슴을 졸였었다.올해 우리사회가 떠다닐 시간의 좌표는 어디쯤 자리매김되어 있을까. 그 어떤 시간과 공간의 여울목을 통과해야만 이 역사의 트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단군이래 5천년 역사에서 최고 수준의 격동기로 이 시대를 풀 것이고 혹여 어떤 사람은 광복이후 굴절된 역사가 반정(바른 자리로 돌아옴) 하는 것으로 이 시대를 정의하고 있음직도 하다.그러나 모두가 「쿠데타」적이었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살아왔었다. 안되면 되게하라는 철학이 지배하는 곳, 부국강병의 철학이 오직 강권적으로 관철되는 시대를 우리 모두는 살아왔던 터였다. 어떻든 부정을 다시 부정하는 변증의 논리가 이 시대처럼 뚜렷했던적도 없었다.한마디로 그것은 격렬하게 요동치며 흘러가는 시간 여행이었다. 이별 여행이었다고 해도 좋다. 이별은 과거로 열린 것이었지만 새로운 만남은 아직 모습을 숨기고 있다. 역사가 투쟁의 대상이 된 것도 사실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이 낡은 것임도 조금은 거친 방식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은 아직은 역시 불명인채이다.지난해 6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그것은 이 시대의 기막힘과당혹감 바로 그것이었다. 이글거리는 태양빛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부조리의 명제인양 그것은 하나의 포스트 모던 방식으로 이 시대의뿌리 없음을 침묵의 언어로 반증해 보였다. 그것은 또한 허영의 구조공학이 붕괴했던 것이며 부실 근대화의 가건물이 무너져내리는것에 다름아니었다.◆ 부정을 부정하는 변증 논리 뚜렷그러나 젊음은 죽음보다도 강한 것이어서 몇몇인가의 젊음은 기어이 살아 돌아왔다. 시멘트 더미를 빠져나온 「살려주세요」라는 너무도 가냘픈 목소리가 이때처럼 모든 국민들에게 하나의 간절한 소망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생명으로의 길고 긴 여행이기를 바라면서. 그래서 부실의 구조학을 생명의 건축학으로 바꾸고 절망의 탄식을 희망의 목소리로 치환하는 과제는 새해의 과제로 넘어왔다.그리고 지방자치 시대의 막이 올랐었다. 그러나 중앙 정치의 압력을 줄이자는 지방정치는 중앙의 갈등을 오히려 구조화했다. 지역주의와 지역 등권론이 부상하고 역사 그 자체가 투쟁의 도마에 오르게 됐다. 이상한 운명의 힘이었다. 갑자기 시대의 호흡은 빨라지고지루하기조차했던 문민호는 돌연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역사는 여울목으로 밀려들어갔고 그것마저 신의 예비인듯 이어 대청산의 시대는 막을 올린다.15년전의 그날들이 양심을 후벼파며 기억의 수면을 뚫고 솟아 올라왔다. 문득 TV를 켜면 그곳에선 군사쿠데타가 재연되고 궁정동의총성은 울려퍼졌다. 역사의 상품화이기도 했지만 알고보니 광주는아직 레떼의 강을 건너지도 못한 것이었다. 12월의 그들과 그들의과거는 기어이 구치소의 차가운 철문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문제의해결은 결국 올해의 묘수 풀이로 넘겨졌다.올해의 정치 역학은 이월이 되어온 「그해 5월」을 과연 어떻게 처리해갈 것인가. 마키야벨리즘과 역사 바로 세우기는 묘한 이중의실루엣으로 지난해를 규정했었다. 「기소권 없음」이 「기소권 있음」으로 바뀌었고 성공한 쿠데타는 결코 성공적이지 않았음이 입증됐다. 반전이 거듭되는 혼돈의 시대엔 언제나 그랬듯이 심진송이란 점쟁이가 유명세를 탔다. 그녀는 올해의 일로 많은 것을 예언했지만 지금 확실한 것은 그녀가 99년까지 모든 예약을 끝냈다는 것뿐이다.어떤 전직 대통령은 골목길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성명서를 읽었다.또다른 전직 대통령은 항룡(최고의 지위에 올랐다는 뜻) 운운하며묵비권의 커튼뒤에 웅크리고 숨어들었다. 이 커튼이 열릴지 여부도올해의 과제로 넘어왔다.무엇보다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한 대통령들이었다. 어떤 전직은 안보 이데올로기를 팔아 치부하기도 했다. 철저한 자기 부정이었다.물론 70년대는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가열찬전진과 숨막히는 독재가 교차하고 있던 특이한 시대였다.단식은 실로 백미였다. 단식으로 YS에 맞선 전직대통령은 83년 그때의 단식이 보도조차 되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나 있는지. 쿠데타는 6개월 이상이나 걸린 역사상 가장 긴 쿠데타였지만단죄 역시 15년이라는 역사상 가장 긴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제다시 6개월이 지나고 거기서 또다시 15년이 지날 때면 모든 원망은다만 웃으며 회고하게 될터인데.마키야벨리즘과 명예 혁명이 오버랩되면서 국민통합이라는 말도 다만 교과서의 한 페이지로 돌아갔다. 그때의 3당 합당이 지역의 대립을 「우리가 남이가」하는 식으로 얼버무린 숫자 놀음이었다면오는 4월의 총선은 어떤 또다른 숫자의 조합을 만들어낼지 궁금한일이다. 지역으로 분할된 어쩔수 없는 국민들이 이번에는 과연 어떤 선택들을 할까.◆ 통일한국으로 가는 환승열차지난 한해 전국민을 하나로 묶었던 것은 애오라지 「열린 음악회」하나였다는 씁쓸한 푸념도 그래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과거로의 여행인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사회 저변의 흐름은 어디까지나 미래로 열린 것이었다. 지난 한해 서점가에서 가장 많이 팔린책은 컴퓨터 길잡이라는 책이었다.정보화 사회의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역시 미래세대인 젊은이들이었다. 윈도 95의 돌풍이 불고 인터넷 이용자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세계화라는 슬로건은 이미 낡은 정치 슬로건처럼 됐지만 지난 한해 전세계로 배낭 여행을 떠난 젊음은 수십만명에 달했다. 이들에게 그려진 세계는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까.학교에 폭력학생들이 늘어난다고 걱정하는 한편에서 「천년의 사랑」이라는 순정연애 소설로 청소년들이 밤을 새웠다. 순수한 열정들은 도처에서 젊음을 입증했다. 서태지는 해맑은 노래로 떠오르는세대의 또다른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전도사로 떠올랐다. 새해에나올 서태지의 5집은 다시 무엇을 노래할 것이며 누가 「만년의 사랑」을 쓸것인가. 모두가 병들어가고 투쟁으로 낮과 밤을 지샌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표피상의 모습일 뿐 그래도 지구는 돌고있고 세대는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경제도 어떻든 전진의 시간표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선 연간수출액이 1천억달러를 넘고 있다. 자동차는 1백만대를 수출했고 반도체는단일종목으로 2백억달러를 외국에 팔 정도로 커져 있다. 기업들은30대 임원, 40대 사장을 쏟아냈다. 아마도 기업 임원의 세대교체는새해에는 더욱 가속화돼 20대 임원이 탄생할 지도 모를 일이다.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정도는 불러제낄 줄 알아야 기업체 간부노릇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어떤 회사는 신세대 노래 3곡은불러야 간부 연수과정을 졸업할 수 있다.총수들이 줄줄이 재판정에 불려나가는 초유의 사태하에서도 기업들은 세계화에 박차를 가했다. 노사분규는 놀랍게도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연간 노사분규가 1백건 이하로 떨어지기는 20년만에 처음이었다. 그 결과 총량지표는 9.2%의 성장률로 나타났다. 경기는 그러나 극과 극을 달려 문제를 던졌다. 중소기업의 부도가 하반기에는 기록적으로 늘어났다.연착륙이냐 경착륙이냐는 경기 논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이것은 올해로 넘어온 문제중의 문제가 되어 있다. 새해에 예상되는 7.5% 이하의 상대적 저성장하에서 중소기업들은 사활을 건 투쟁을 해야 할것이다.그래서 새해의 화두는 평형 감각일 수밖에 없다. 권력의 평형이요경제력의 평형이며 성장률과 서민생활의 평형이 올해의 과제로 넘어왔다. 소외된 자가 고루 대접받는 사회를 선진사회라 한다면 경제 분야에 있어 올해의 화두는 역시 「중소기업의 부활」이며 「생활복지의 증대」가 될 수밖에 없다.급변하는 뉴스에서 어지러운 눈을 잠시 다른 데로 돌리면 그래도뻗어가는 국력이 있고 「미래 여행」으로 규정되는 근저의 변화도감지되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북한과의 교섭도 진전을기대할 만하다. 어떻든 핵문제가 단락이 지어져 올해는 95년산 새쌀이 다시 넘어갈 수도 있을 게다.시간 여행을 거슬러 숨가쁘게 달리는 노선의 어딘가에는 미래로 내달리는 열차를 갈아타는 환승역도 있을 것이 분명한 것이다. 광복50년을 결산하는 시간여행 자체가 당초부터 이 환승역을 향해 달려오지 않았는가. 우리뿐만도 아니었다. 러시아 폴란드 등에서는 잇달아 공산당이 정계를 흔들었지만 이는 악령의 부활이라기 보다는집나간 아들의 귀가일지도 모를 일이다. 유엔도 50주년을 맞았고이제 새로운 반세기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있다. 세기말이요 한시대의 마감이 진행되고 있다.이제 21세기로 가는 노정에 마지막 5년만을 남긴 새해가 시작됐다.우리는 다시 21세기행 열차를 타고 미래로의 시간 여행을 떠나야한다. 「통일 한국, 복지 한국」이라는 종착역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