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경영하다보면 자주 도전과 포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선다. 이럴 때 대부분의 젊은 기업인들은 도전의 길을택한다. 도전이야말로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전의 수준이 지나치면 예상치못한어려움을 안게 된다. 더욱이 이런 과욕속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젊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특수형광램프 및 금융자동화제품생산업체인 화덕산업의 최대병사장(47)은 고려무역과 동국무역에서 수출과장을 하다가 34세때인83년 3월에 무역회사를 차려 사장이 됐다. 그가 서울 논현동 4거리 신태양빌딩 2층에 원천교역을 설립, 처음시작한 사업은 각종 주방기구를 미국시장에서 수입해 판매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처음부터 진공청소기 등의 부문에서 짭짤한 재미를 봤다. 여기에 자신을 얻자 그는 작은 수입사업은 눈에 차지않았다. 대규모 수출사업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큰 규모의 비료해외입찰사업과 시멘트수출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같은 대규모사업은 종합상사수준에서나 추진할 수 있는 사업임에도 과감하게 도전을 했다.먼저 미국무역회사와 삼각무역관계를 맺어 중국복건성 비료입찰에참여하는 한편 서남아지역의 비료 입찰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소규모무역업과 달리 많은 자금이 소요되고 정보파악을 위해 인원도 대거 동원해야 했다. 거의 1년간을큰 비즈니스만 찾아다니다 보니 회사가 적자에 허덕이다 끝내는 문을 닫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됐다. 최사장은 일단 회사를 정리하기로 했다. 당시 살고 있던 명일동아파트를 팔아 밀린 빚을 모두 갚았다. 3년간 열심히 수출시장을 뛰어다녔지만 남은 것은 단 한푼도 없었다. 집을 팔고나니 거처할 곳조차 없었다. 다행히 은행에 다니는 친척의 도움으로 은행돈을 대출, 명일동에 전세집을 하나 얻었으나 이제 출근할 곳이 없었다. 그는 차비만 가지고 집을 나와 무작정 버스를 탔다. 찾아간 곳은 남산식물원 뒤에 있는 한적한 벤치. 최사장은 이날부터 3개월간 식물원 뒤 벤치로 출근했다. 이곳에서무엇을 잘못했는지 곰곰히 분석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잘못은 과욕 때문』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경영능력을 쌓는데는 관심을 두지않고 목표를 세우는데만 급급해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앞으로 사업을 다시 시작하면 결코 과욕을 부리지 않고 착실한 경영으로 기업을 키워나가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빈털터리가 된 그로서는 다시 시작할 자금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월급쟁이에서 출발했다. 전에 다니던 고려무역의 선배로부터 소개를 받아 주식회사삼천리에 수입부장으로 취직을 했다.고려무역에서 2년간 산업체용 전동공구 수입업무를 맡았고 동국무역에서도 4년간 원목 대두 수출입 업무을 담당해온 그에게 이 업무는 당연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분야였다. 이 회사의 창업주의아들인 이천득부사장과 뜻이 맞아 전문경영인으로의 길을 걸을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87년 이천득부사장이 간암으로사망하자 사표를 던지고 다시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절대과욕은 부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이때 거래관계를 맺어오던 이성재사장으로부터 랜턴용 소형램프를만드는 공장을 소개받았다. 부광전자란 이름의 이 회사는 종업원15명의 영세공장으로 매출은 거의 전무상태인 업체였다. 이 회사를인수하는데 필요한 자금은 1억5천만원선. 그렇지만 그에게 이를 인수할 자금이 충분치 못했다. 그는 다시 자금을 감당할 수 있는 김영덕사장을 소개받았다. 김사장을 공동대표이사로 세우고 부채를안은 채 1억5천만원에 부광전자를 인수했다.◆ 종업원과 동고동락 현장애로 해결87년 7월 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회사명을 화덕산업이라고 바꾸었다. 그는 2년만에 다시 기업인으로 일어섰다. 전에는 무역업자였지만 이번엔 제조업자가 되었다. 그가 이 회사를 인수한 것은 랜턴용소형형광램프가 내수에는 빛을 보기 어려우나 홍콩 등 동남아지역으로의 수출은 가능성이 있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제조업을 시작해보니 지금까지 예상치 못했던 여러가지 어려움에 부닥쳤다. 무엇보다 현장직원을 관리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일부러 말을듣지 않는다기보다 기술숙련부문에서 너무나 뒤떨어져 제대로 된제품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회사를 인수한지 한달뒤 거처를 공장으로 옮겼다. 종업원들과함께 먹고 자며 현장애로를 하나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했다. 밤낮을가리지 않고 기름때를 묻히며 고장난 기계를 고치고 생산된 제품을일일이 검사하기도 했다. 이런 고생에 힘입어 영업첫해인 88년에3억원어치의 램프를 홍콩으로 수출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대출받아 건평 1백평의 공장을 2백50평으로늘리고 U형 형광램프생산에 나섰다. 공장대지도 6백여평에서 9백평으로 늘렸다. 이듬해에도 장사는 잘되었다. 홍콩시장에 60만개의 램프를 수출하는 실적을 올렸다. 화덕산업은 전량을 수출하는 업체가 되었다. 수출에 승부를 건 것은 최사장이 무역에 정통한데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92년도에 접어들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중국이 개방되면서 전등기구분야에서 우리제품을 추격해오기 시작한 것이다.이제 기존제품만으로는 2년을 버티기가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드디어 다시 포기냐 도전이냐를 결정해야 할 시기를 맞았다. 그는무척이나 망설여졌다. 전등기구부문에서 살아남으려면 첨단제품을생산할 수 있는 업체로 구조조정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엄청난 설비투자와 기술자의 양성이 수반되어야 했다. 『이렇게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이 무모한 짓은 아닐까, 과욕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이 문제를 놓고 몇달을 고심했다. 결국 그는 『여기서 그냥 포기할수는 없다』고 결정을 내렸다. 단순한 개선으로는 결코 살아남을수 없다는 판단으로 회사를 전면 개혁하기로 했다. 일단 구공장을완전히 폐쇄하고 공장을 다시 짓기로 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혁신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공장은 물론 수위실까지 새로 지었다. 2백50평정도이던 공장을 9백평으로 확장, 신설했다. 설비도 옛것을 미련없이 버렸다. 기계도 절전형으로 선택하고 인력이 덜드는자동화라인을 도입했다. 이같은 설비투자 과정에서 중소기업진흥공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자진해서 받았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인들은 외부의 충고를 좀체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행태가 기업에 큰 손해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최사장은 중진공전문지도사의 지도에 적극적으로따랐다. 그는 중소기업도 스스로 구조조정을 하기 위해서 전문적인기술연수와 경영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구조조정기를거치는 3년간은 매출이 늘어나지 않았으나 얻은 것이 더 많았다.중진공의 안내로 이 업종교류에 참여하여 금융자동화기술을 가진카스모와 제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덕분에 지폐계수기등 첨단 금융자동화기기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카스모측은 기술과판매를 맡고 화덕산업은 생산만 담당하기로 한것이다. 카스모와 화덕산업의 분업관계는 요즘 중소업계에서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잘진행되고 있다.화덕산업은 구조조정기간동안 개술개발을 계속해 3파장형광램프를국내에서 처음 개발하는 등 첨단전등기구를 많이 개발했다. 이들제품이 올해부터 본격 양산되고 있어 이제 국내 전등기구업계의 판도가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최사장이야말로 목표보다는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경영에 그대로 옮긴 기업인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