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다가 40세에 창업을 하려고 스스로 뛰쳐나오기는 참 힘든 일이다. 그동안 쌓아온 경력과 실적을 다 버리고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기란 웬만한 용기로는 어렵다. 무엇보다밀려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뿌리치고 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대정기계의 박헌진회장(57)은 지난 78년 현대건설 중장비공장 공장장을 맡고 있다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창업의 길을 선택했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던 69년 11월 현대건설에입사한지 10년만의 일이다. 이명박의원(신한국당)과 입사동기인그는 현대그룹에서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승진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입사동기중 고려대출신으로서는이명박의원이 가장 빨리 승진했고 연세대출신으로는 박회장이 앞섰다. 입사이후 두사람은 선의의 경쟁을 벌였고 지금도 각별한 친구사이다. 현대그룹안에서 이처럼 실력을 인정받던 그가 갑자기 그만두려하자 회사측에서는 신설 계열회사를 맡기겠다며 말렸다.그러나 그는 전문경영인의 길은 언젠가는 한계에 부닥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늦어질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창업의 길이 모험의 길이겠지만 장기적인 측면에서는더 큰 꿈을 펼칠 수 있을 것으로내다봤다.◆ 이명박의원과 현대에서 쌍벽이뤄입사한지 꼭 10년만인 78년 10월 사표를 냈다. 한달뒤인 11월 그는서울 신설동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하나 얻어 대정기계공업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창업의 길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현대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건설장비인 호이스트카업체를 만들기로 했으나 자금을 조달하는데 어려움이 뒤따랐다. 거래처의 태도도 대기업에 있을때와 판이했다. 그럼에도 박회장은 그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이제 대정기계를 비롯, 극동운반기계 대정건영 주식회사타이다이(해외법인) 등 4개사를 거느린 기업인이 되었다.대기업을 다니다 뒤늦게 창업을 했음에도 큰 슬럼프없이 계속 성장을 이룩했다. 이런 성장을 일궈놓은 경영비결은 과연 어떤 것일까.이 회사는 경영조직이 그다지 남다르지 않다. 임원들의 성격도 심하게 두드러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이 회사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신기한 힘을 가진 회사이다. 지난해 일본의 기술제휴업체인 키다이의 연구원들이 이 회사를 찾아왔다가 이곳의 따뜻한 분위기에 젖어출장을 연기하면서까지 기술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기자도 이 회사를 찾아가면 어릴때 외갓집을 찾아갔을 때처럼 왠지 푸근함을 느낀다. 어디서그런 분위기가 솟아나는 것인가. 그 연유를 풀어보자.첫째 박회장은 실무적인 업무 하나하나에 대해 사원들에게 따지는일이 결코 없다. 그는 구체적인 업무기안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그 사람의 인품을 고치도록 요구하거나 칭찬한다. 대부분의기업인들이 가정보다는 회사에 더 충실할 것을 요구하지만 박회장은 회사와 가정을 한울타리로 보려 한다. 직원들 모임에 가능한한 부부가 함께 참석하도록 한다. 그의 겸손한 성격때문에 부하사원들이 부부간에 참석해도 전혀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박회장은 해마다 한두번씩 사원부인에게 책을 선물한다. 사원부인들중에는 책을 읽고 회장에게 편지를 쓰기도 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회사의 경영혁신운동이다. 서울 논현동 관세청앞에 있는 대정기계 사무실에 들어서면 「탈개운동」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그옆에는 탈개운동을 위한 사원들의 실천사항이 빽빽히 적혀 있다.탈개운동이란 무엇인가. 이 경영혁신운동은 일반회사들에서 실시하는 100PPM이나 리엔지니어링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박회장은 탈개운동이란 의식바꾸기운동이라고 못박는다. 지금까지 기업들이 벌여온 사관리운동이나 품질관리운동은 물리적 측면이 강조된 개혁운동인데 비해 이 탈개운동은 매너리즘을 깨는 순수한 정서혁신운동이라는 것. 이 탈개운동은 내용을 살펴보면 정서적인 것에 중점을둔다. 각 임원 및 사원들이 「탈」항목에 앞으로 탈피해야할 사항을 적는다. 지금까지 젖어있던 매너리즘적인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내용을 적어둔다. 이에 반해 「개」항목에는 앞으로 개선해야 할 사항을 적는다. 이 항목은 1분기에 한번씩 바꿔나간다.실제 적어둔 내용을 보면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정말 하찮은 것들이 많다. 이번 분기 이영우부사장은 탈항목에 「음주 다음날 지각」을 새겨놨다. 접대술을 마신날 가끔 30분정도씩 출근 시간에 늦는 일을 없애겠다는 뜻이다. 개항목에는 1일1거래처방문을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5백여명의 사원들이 적어놓은 탈개항목을 보면 매우 현실적이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영업부의 장재영씨는 탈항목에 「급히 운전하는 습관」을 쓰고 개항목에는 「전화통화시 메모하는 습관을 갖자」라고 다짐했다. 모두들 회사경영내실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사원각자가 고정관념을 깨는 일에 초점을맞췄다. 탈개운동추진본부장인 김창성이사는 이처럼 개인적이고 하찮은 듯 보일 수 있는 다짐이 사원 스스로 개선을 거듭하는 동안본인의 의식개혁은 물론 회사의 경영혁신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탈개운동으로 사원들 자발적 업무추진지난해부터 실시한 이 탈개운동 덕분에 대정의 사내 분위기가 더욱따뜻해졌다. 가끔 임원들의 경우 결재사항의 제목만 보고서 언성을높이는 부정적인 태도가 사라졌다. 외국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원들도 크게 늘어났다. 지각하는 사원, 짜증내는사원도 없어졌다. 이같은 경영혁신운동은 박회장의 퍼스낼리티를 잘 반영한 것이다. 사내에서 너무 합리적이고 빡빡한 혁신운동만 추진하다보면 오히려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박회장의 판단이다.이런 정서적인 사내분위기는 예상외의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대정기계 발전사업본부가 이뤄낸 성과가 이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회사가 건설한 삼천포화력발전소는 파워블록건설 등에서 1만포인트이상의 접합기술을 요구했다. 이 대규모화력발전소가 완공됐을 때1백여개의 결점이 돌출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흔히 있는 일이었다.그러나 놀랍게도 단1개의 결점도 나타나지 않았다. 세계 발전소건설사상 처음있는 일을 해낸 것이다. 이런 실적은 단순히 합리적 경영혁신운동으로는 일궈낼 수 없는 것이다.정서적인 운동을 통해 사원들이 자발적으로 업무를 추진한데 따른결과임에 틀림이 없는 듯하다. 이런 정서적인 인화의 힘에 높은 평가를 주어 한국개발기술금융(KTB)과 한국기술금융 한국개발투자등 3개 신기술사업금융회사에서 34%지분에 투자하기도 했다. 박회장이 이뤄낸 이 정서적인 바탕위에 엄청난 기술투자를 하는 것이이 회사의 또 다른 강점이다. 원통형지브크레인, 무연무취소각로,공사용로봇, 원자력발전소파워블록 등 이 회사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 상품화한 기술은 무려 20가지에 이른다.최근들어서는 송전철탑을 건설하는데 필수장비인 철탑크레인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이번에 개발된 크레인은 산간벽지 등에서 대규모 철탑을 건설하기 위한 것으로 2t급의 자재를 1백50m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철탑크레인의 개발로 산악등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기초공사없이 철탑공사를 할 수 있는 마운틴크레인도 개발했다. 이 마운틴크레인은 3개의 유압형 지지대가기초공사없이 철탑 및 구조물을 공사할 수 있는 것이다. 대정의 이런 기술개발능력도 박회장이 만들어낸 정서적 분위기가 밑바탕이된 덕분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