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조직이든 비서실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힘」이다. 조직의 우두머리는 그 조직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고 비서실은 그 힘의 행사를 돕는다. 오랜 기간 권위주의가 지배해온(공조직이든 사조직이든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다) 한국의 풍토에서 비서실은 곧 보스 분신으로 간주되어 왔고 비서실에의 저항은보스에의 저항과 동일시된다는데 이의를 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대통령 비서실은 한국에서 가장 큰 힘의 발원지라고할 수 있다. 청와대라는 권부(權府)를 빌려 좋게 말할 때는 대통령을 대행해서, 안좋게 말하면 호가호위(狐假虎威)해서 국정운영의한 축을 좌우해온 집단이 대통령 비서실이다. 비서실은 대통령의지시사항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대통령을 움직이게도 만든다. 때로는 대통령의 국정 구상을 받아 내각과 함께 추진하고 때로는 정책선택을 망설이는 대통령에게 길 안내도 한다. 대통령책임제 아래에서 대통령은 나라를 움직이고, 비서실은 대통령을 움직인다.대통령 비서실의 기능은 정부조직법 문면상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보좌의 사전적 정의는 상관을 도와 일을 처리하는 것. 임무 자체가 추상적이면서 막연한만큼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무것도 안할 수도 있고 어떤 일을 해도 무방하게끔 되어 있는 셈이다. 이후락 비서실장 시절이 대표적인 경우로,실제 지금까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누려온 측면도없지 않았다.비서실의 가장 큰 일과는 정부 부처의 업무를 수시로 체크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즉 현업 부서에 대한 모니터링이다. 비서실은 비서실을 총괄하는 실장 외에 모두 11명의 수석비서관실로구성되어 있고 이들 비서관실에는 비서관과 행정관이 있어 각각의부처를 담당한다. 경제수석은 경제부처, 외교안보수석은 외무 국방, 행정수석은 내무 총무처, 민정수석은 법무, 공보수석은 공보처, 사회복지수석은 노동 보건복지 교육, 정책기획수석은 환경 문체, 농림해양수석은 농림 해양수산, 하는 식이다. 이밖에 정무수석은 대 언론 일부와 정당관계, 총무수석은 청와대 안살림과 대통령친인척 문제, 의전 수석은 그야말로 의전관계를 맡고 있다.◆ 부처간 연락책 불과비서실에는 비서실 업무의 전문성을 지원하기 위해 해당 부처에서비서관이 파견나와 있으나 이들 업무의 상당 부분은 양측의 의견을상호 전달하는데 할애되고 있다. 정작 해야 할 정책개발기능은 부차적으로 밀려나고 연락책 역에 그치고 있다는 얘기다. 심할 경우파견 비서관은 소속 부처를 위해 알게 모르게 로비를 하거나 대통령의 질문 사항을 입수해 소속 상관에게 귀띔을 해주는 사례도 있을 정도다. 노태우 정권 시절 한 각료가 눈치없이 너무 상세히 답변을 준비해온 바람에 대통령이 『누가 미리 가르쳐줬어』라고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같은 비서실의 부처 모니터링업무는 이미 3공화국 때부터 자리잡은 것으로 대통령도 현안이 생기면 장관을 제치고 수석 비서관을 찾는게 관행겸 제도로 굳어져있는 상태다.그 결과 비서실은 「또 하나의 내각」으로 치부되면서 부처쪽에서는 「옥상옥」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없지 않다. 특히 수석 비서관과 해당 부처의 의견이 다르거나 의견 조율이 이뤄지지 않았을때는 당연히 문제가 발생한다. 파워 게임의 양상이 빚어 지는 것이다. 이석채 전경제수석이 금융개혁위 구상을 들고 나왔을 때 재경원측에서 전혀 사전 상의가 없었다며 초창기에 불쾌감을 드러냈던것이라든가, 또는 사안은 약간 다르지만 김종인 전경제수석시절 경제부총리들이 겉돌았다고 평가되고 있는 것도 「두개의 내각」에서빚어진 마찰 사례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현상은 대통령 비서실이 단순 참모나 자문 역할을 넘어 현실적으로 내각에 대한 「명령 권한」을 지니고 있는데서 비롯된다.현재 수석을 포함한 비서관(3급 이상) 숫자만 60명에 가깝다. 법적으로는 4·5급 행정관을 63명까지 둘 수 있도록하고 있어 이 숫자를 포함하면 세력은 더욱 배가 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힘을 갖고 있는 비서실에 1백명이 넘는 비서관·행정관들이 포진하고 있다』며 『부처에 대한 영향력은 그만큼 더 강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단순히 숫자의 많고 적음이문제가 아니라 그들중 상당수가 부처 업무를 쫓아 다니는 일을 하고 있어 비효율을 낳고 있다는 진단이다.물론 비서실에서는 국가 지표의 개발이라든가 혹은 다수의 부처가연관된 통합적 성격의 대형 프로젝트 등 굵직한 테마의 업무도 담당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래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금융 교육 사법 노동 등 각 분야에 걸친 각종 개혁작업이나 세계화 구상,10% 경쟁력 강화, 정부조직 개편 작업 등은 일단 비서실에서 뼈대를 세우고 해당 부처에서 살을 입힌 아이템들이다.원론적으로 말할 때 대통령 비서실의 업무는 이처럼 국가적 지향점을 설정하고 국정 운용의 대강을 세우는데 초점이 맞춰져야한다.그런 기반 아래 총체적 관점에서 행정 전반에 대한 기획 관리를 해야 한다. 또 세계적 동향을 적시에 파악하고 민심의 흐름을 올바로읽어 대통령으로하여금 방향감각을 잃지 않도록하는 것도 비서진의놓칠 수 없는 임무다. 비서진에게는 아울러 냉철한 현실 분석력과예측력도 요구된다. 대통령이 오판을 해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낭비를 초래하고 민심이 동요 내지 이반하는 것을 사전에 막기위해서다.그러나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 비서실이 과연 이러한 기대에 제대로부응해 왔는지는 의문이다. 가까운 예로 지난 95년 6월 지자체선거패배 직후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내용의담화문을 준비했다가 삼풍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철회한 적이 있다.당시 출입기자들 얘기에 따르면 그 담화는 오만과 편견에 가득차있는 담화문으로서 발표되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었다는 후문이다.그 비슷한 예로 97년 연초의 기자회견을 들수 있고 또한 대북정책에서 줄기를 못잡고 강경과 온건을 넘나드는 등 혼선을 빚고 있는것 역시 보좌가 미흡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직접적으로는 김대통령의 강한 주관 또는 독선과도 무관치 않은 문제라지만,그렇다해도 비서진이 면책될 수는 없는 일이다. 참모는 자리를 거는 한이 있더라도 직언과 간언을 아끼지 않아야한다. 안타깝게도비서실 내부에서조차 현재 그 정도의 소신과 역량을 갖춘 인물은많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세기말적 시대흐름 읽는 혜안 절실일각에서는 이러한 제반 문제점들을 들어 대통령 비서실의 구성과역할을 전면 재검토해야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미국이 한국의전범(典範)이 될 수는 없겠지만, 가령 미국 같은 경우는 「대통령부」라고 부를 수 있는 별도의 정부 조직에서 국가를 통괄 지휘 기획 관리 평가하는 기능을 맡고 있다. 대통령에 대한 개인 보좌 차원을 뛰어 넘어 전문적이고 영속성을 지닌 비서관료 조직이다. 정권 보좌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운영기관인 셈이다. 한국과는비서실의 개념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또 한가지 대통령 비서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이른바「독대」 관행이다. 비서진과 각료가 대립된 의견을 갖고 있다면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토론을 벌이고 장단점의 여과 과정을 거쳐합의점을 도출해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양한 의견을 지닌 사회는 그렇게 운영되어야 마땅하다.그러나 독대가 계속되는 한 그런 민주적 의견수렴 절차는 설 자리가 없다. 최근의 노동법 날치기 처리과정에서 보듯 특정 비서진에대해 오히려 「보안」을 당부하는 식의 비서실 운영행태는 분명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고 해야 한다. 비서진간의 갈등은 대통령 본인은 물론 국가이익에 대해서도 저해요소로 작용할 뿐이다.비서에게는 실로 다양한 덕목이 요구된다. 충직성도 있어야하고 전문성도 지녀야하며 필요시에는 용기도 갖춰야한다. 특히 지금 한국이 대내외적으로 처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으로는 세기말적 시대의 흐름을 읽는 혜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그것을 대통령에게 전달해 오도된 길을 걷지 않도록 해야한다. 실로 지난한 일이겠지만, 자신이 비서의 자리를 수락한 이상 그 책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참모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