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제대로 돌아야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흘러야 한다. 돈은 인체의 혈액에 비유된다. 그래서 돈이 제대로돌지 않으면 경제가 잘 굴러갈 수가 없다. 세계 11위의 GNP대국도금융질서가 흐트러지면 예상밖의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한보와삼미의 연이은 부도는 자금흐름에서 심장역할을 하는 은행을 먼저강타했다. 다음으로 부도 여진은 증권 종금 신용금고 파이낸스등전금융권에 전달됐다.은행들은 「준법 대출」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 한보수사와 관련해검찰의 수사의지도 서슬이 시퍼렇다. 뇌물을 받지 않았어도 규정을지키지 않았거나 담보없이 대출해준 행위를 업무상 배임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그 후유증은 온전히 기업들의 몫으로 돌아온다.가뜩이나 불황탓에 울상을 짓고 있는 기업들은 자금한파라는 또다른 홍역을 앓아야 하는 위기에 몰려 있다. 사채시장에서는 기업살생부(부도기업 리스트)가 흉흉하게 돌아 기업들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 한보의 융통어음이 본격적으로 돌아오는 4월에는 금융대란이 일어날 것이란 성급한 우려도 없지않다.◆ 늘어가는 외채 자금시장에 먹구름신용공황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경직된 원칙론만을강조했다. 한계기업이나 부실기업의 퇴출엔 정부가 개입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물론 정부는 한보사태에 따른 연쇄 부도를막기 위해 통화를 대량으로 풀었다. 82년 이철희 장영자 어음사기 사건 때나 93년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때와 마찬가지였다. 통화당국의 자금수혈은 단기적으로 약발이 섰다. 한보 충격으로 상승했던실세금리는 이내 내림세로 돌아서 지난 1월말 12.00%까지 떨어졌다. 채권을 매수하는 기관투자가들은 쾌재를 불렀다.지금이 채권을사들이는 적기라고 여겼다.정부는 한보사태직후 3조원 정도의 자금을 푸는 등 대응책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의 설비자금수요도 감소하는등 금리가 떨어질 것이란 분석이 우세했다.실제로 한보사태가 터진 이후 증권사등 일부 기관투자가들은 금리하락을 예상하고 과감하게 채권매수에 나섰다. 심리적인 측면 말고는 금리상승을 부추길 요인이 별로 없다는 자신감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 함정이 있었다. 금리는 2월들어 상승세로 돌아섰다. 채권을 매수했던 기관투자가들은 매매손실을 감수하면서 오히려 보유채권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금리전망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뒤늦게깨달은 것이다.통화당국이 돈을 풀어도 금리가 떨어지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무역 및 무역외 수지, 이전수지가 큰폭의 적자를 기록함에 따라 경상수지적자는 2백37억달러에 달했다. 반면 자본수지 흑자규모는 1백72억달러에 그쳐 종합수지가 57억달러의 적자를 나타냈다.그만큼 돈이 해외로 빠져나간 것이다. 여기에 기업과 개인들이 달러화를 집중적으로 사들이면서 올들어 2조7천억원의 시중자금이 달러화에 묶이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김병철 동양증권 채권팀장은 기존에는 회사채발행물량등 자금수급에 따라 결정되던 금리가 이제는환율움직임및 경상수지 등과 연관돼 움직이는 경향이 두드러지게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본자유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국내자금시장이 그만큼 국제화됐다는 얘기도 된다.갈수록 늘어가는 외채도 자금시장에 먹구름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지난 96년말 총외채는 1천1백10억달러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됐다.이는 95년말에 비해 3백26억달러 증가한 수치다. 특히 문제가 심각한 것은 총외채중 단기외채(만기 1년 이하)비중이 계속 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단기외채비중은 전년도말보다 2.2%포인트 높아진 60%정도를 기록해 외채상환에 대한 부담도 국내 자금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한국 경제에 대한 총체적인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외국인들의 주식투자 열기도 한풀 꺾였다. 기업들의 수익성이 크게 떨어진데다 환율이 오르면 외국인들은 환차손 부담까지 떠안아야 한다. 증권거래소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 1월중 4천억원이상의 주식을 순매수한 외국인들은 2월부터 금융주를 중심으로 주식을 내다 팔아 3월중 순매도규모가 3천억원에 달했다. 경상수지적자가 줄지 않는 상황에서해외자본유입이 멈칫한 것은 결과적으로 자금시장을 조이는 또따른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얼어붙은 자금시장 투자대상도 없어돈이 해외로 증발하고 겉도는 사이에 운전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망하는 기업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0.10%대에 머물던 서울지역 어음부도율이 2월이후 0.20%대로 껑충 뛰었다. 3월들어 20일까지 당좌거래가 정지된 업체는 3백44개로 공휴일을 제외하면 하루평균 22개사가 부도를 낸 셈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금경색의 후유증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기업들은 자금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다. 어지간한 기업들은 보증기관을 구하지 못해 회사채를 제때 발행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채및 금융기관의 대출은 일부 대기업이 독식하고 있는 형편이다. 기업의 자금난에도 불구하고 올들어 3월말까지 은행의 대출금이 크게증가한 것은 통화당국의 자금공급을 바탕으로 대기업에 여신을 집중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종금사 관계자들도 환율상승에 따라외화를 원화로 바꿔 자금을 써오던 대기업들이 외화는 그대로 둔채단기자금시장에서 뭉칫돈을 끌어다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따라 기업들의 당좌 대출 한도소진율이 크게 높아졌다. 10대그룹이발행한 어음도 현대 삼성 LG등 5대그룹의 어음을 제외하곤 금리를더 주어야 할인받을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유상증자등 직접금융시장에서 자금을 끌어쓰는데도 어려움이 따른다.은행등 금융기관의 해외 현지법인들도 외자를 도입하기 어려워졌다. 일본계 은행들은 한보사태 이후 1일물 시장에서 국내 은행에돈을 빌려주지 않고 미국계 은행 역시 국내 은행에 대한 자금제공을 꺼리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여기에 3월말 결산기를 맞아 일본계은행들이 국내 은행들로부터 회수할 자금규모가 은행권 전체로30억달러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 은행들은 해외업무가 정지되는 극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책을 마련하는 사례도 있었다.한국은행이 최근 국내 은행의 해외법인에 10억달러를 긴급 지원한것도 이같은 어려움을 반영한 것이다. 한보 삼미 등에 물린 은행들의 신용이 떨어지면서 조달금리도 상승했다. 상장회사들도 전환사채(CB) 주식예탁증서(DR)등 주식연계증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기 힘들어졌다. 장기적인 증시침체로 외국투자가들이 한국물에 대한 투자를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자금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마땅한 투자대상을 찾기도 쉽지 않다. 단기 금융상품을 제외하고는 돈이 어디로 가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못한다. 2.4분기중 증시가 기지개를 켜긴 어려울 것 같고 지난해말꿈틀대던 부동산 경기도 예상밖으로 급속히 꺾이고 있다. 부동산전문가들은 당초 올해가 부동산의 경기 순환상 대순환인 10년 상승세를 타는 시점이고 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어 부동산경기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부동산시장을 주도한다는 아파트는 물론 상가 준농림지 오피스텔 등도 별다른 인기를끌지 못하고 있다.증시의 경우 주가바닥을 염두에 둔 큰손들의 자금이 입질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대세를 돌려놓기는 아직도 역부족이다. 증권전문가들은 경기침체가 계속될 경우 수급측면에서 다소 유리한 소형주위주의 단기투자가 활기를 띨 것으로 내다봤다.지난해까지 급상승세를 타던 골프 회원권시세도 약세로 돌아섰다.이에따라 신설 골프장들의 회원권분양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본지의 2/4분기 증시전망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증시가 회복세로 돌아서도 제한적인 상승에 그칠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반면 사치성 소비재는 꾸준히 팔려나가고 있다. 1천만원이 넘는 수입카펫 수입보석, 1억원이 넘는 외제차는 꾸준히 팔려나가고 있다.정작 생산현장에서 씨가 마른 돈이 소비시장을 활발히 넘나들고 있는 셈이다. 소비가 늘면서 개인여유돈 비율은 지난해 8.3%로95년(11.3%)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개인의 여유돈은 금융기관저축 등으로 흡수돼 기업의 부족자금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개인의 돈 여유가 적다는 것은 기업들의 자금사정이 그만큼 빡빡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들이 과소비를 억제해 저축을 늘려야 경기를 회복시킬수 있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오고 있다. 문순민하나은행의 프라이빗 뱅킹팀장은 불황기 재테크 작전의 왕도는 절약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다가는 그나마있는 재산을 다 날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려울수록 정도를 걸어올바른 재테크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문팀장은 말한다.하여튼 경제가 살아나려면 표류하던 돈이 정상궤도를 찾아 제대로돌아야 한다. 정부도 원칙론만 강조할 게 아니라 대내외적인 국가신용추락현상을 치유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배려해야 한다. 금융기관도 말로만 흑자도산을 방관하지 않겠다고 밝힐게 아니라 경쟁력이 있는 기업에 과감하게 자금을 대줘야 한다. 신용평가나 리스크관리에 대한 노하우를 갖춘다면 경쟁사에 비해 높은 수익을 올릴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