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탯줄」로 태어난 한 몸체. 지난 73년 12월에 법안으로공포됐다가 14년만인 88년부터 시행된 국민연금이다. 하나의 탯줄은 보건 복지 노동업무를 전담하던 보사부였고 다른 하나는 우리경제성장에 있어 싱크탱크이자 관제탑역할을 담당했던 경제기획원이었다.국민연금법안이 공포됐던 70년대 초반은 경제제일주의를 내걸고 온국민이 「잘 살아보자」는 한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온 60년대를 돌아보는 때였다. 당시 경제성장의 주역이었던 해방·전쟁세대는 성취감과 함께 퇴직 노후 등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다.사회적으로도 인구집중, 핵가족화, 재해와 범죄 증가, 근로인구 감소와 노령인구의 증가 등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역기능이 대두됐다. 여기에 군사혁명을 통한 집권이란 「태생의 한계」와 72년 유신헌법공포 등으로 국민들에게 뭔가 「번듯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잠재적인 압박감도 정부에 작용했다. 그런 심리적 부담은 『군사혁명 후 최고회의 보건분과위원장이 「복지국가 해야할 것 아닌가」하고 보사부장관에게 말하고 군출신의 보사부장관도 수시로「복지」를 강조했을 정도였다』는 것이 국민연금관리공단 민재성고문의 말이다. 물론 이전에도 선언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각종연설이나 회견에서도 국민복지에 대한 언급은 의무사항처럼 수없이나타났었다. 하지만 70년대의 상황은 보다 실체적이었다. 아울러사회경제의 균형개발전략이 필요하다는 UN 경제사회이사회의 권고에 따라 정책엘리트들 사이에서도 성장에 걸맞는 「옷」 즉 국민복지의 필요성이 대두됐던 때였다.이런 시대적 배경아래 보사부탯줄과 기획원탯줄이 만난 것은 73년1월 12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 이자리에서 박대통령은 근로자복지향상과 복지국가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공무원 군인을 제외한 일반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퇴직·장해·유가족연금 등 사회보장연금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대통령의 기자회견 이전에도 이미 보사부내에서는 연금제도입에 대한 검토가 있었다. 『63년부터 이미 보사부외곽조직으로 사회보장심의위원회(이하 사보심)와 산하 연구실에서 연금제 도입 등 사회보험제도에 대해 이론적 체계를 세우며 검토중이었다』는 것이 당시 보사부 사회국장이던 박준익 현삼우화학공업 회장의 말이다. 당시 국내에 보험수리에 관한 전문가가 없어 ILO의 보험수리전문가를초빙해 보험료와 급여체계를 제시한 뒤 적자없이 얼마나 갈수 있느냐를 따져보기도 했다. 『초빙된 ILO전문가에 따르면 74년에 연금제도를 시행해 향후 50년간 재정적자없이 안정운영이 가능하다는결론이 나오기도 했다』는 것이 박회장의 말이다.◆ 보험요율 3% 결정, 추산에 의존하기도한편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정책을 제시했다.농어촌개발 중화학공업육성 수출증대 등을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3대 목표로 제시한 것이다.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중화학공업육성정책으로 철강 조선 석유화학 전자산업 등에 획기적인투자를 하는 한편 SOC확충 수출단지조성 등을 구체적으로 밝혔다.이에 따라 경제개발계획을 총연출했던 기획원으로서는 중화학공업우선정책에 따른 막대한 재원의 확보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이에대해 기획원산하 연구기관인 KDI(한국개발연구원)에서 미국 사회보장협회 폴 피셔사무국장을 초청해 연금제도 전반에 관해 조언을 듣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마치고 투자재원으로서 연금제도입의 필요성을 제기한 상태였다.보사부의 국민복지향상을 위한 사회보장보험과 기획원의 중화학공업육성을 위한 투자재원확보라는 서로 다른 목적이 국민연금도입이라는 한가지 목표물 앞에서 만난 것이다. 『당시 보사부가 여러번에 걸쳐 연금실시를 건의했어도 경제마인드가 부족해 거부됐지만기금조성을 골자로 한 기획원의 연금제건의에 매력이 끌린 박대통령의 관심을 사 국민연금이 빛을 보게 됐다』는 것이 당시 KDI연구원으로 연금제도입에 깊이 참여했던 인하대 박종기교수의 말이다.연두기자회견 보름 뒤인 23일 대통령의 보사부연두순시에서 당시이경호장관은 국민복지연금제도 시행계획을 보고했으며 74년부터시행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그해 2월에 경제기획원과 보사부를 중심으로 한 「연금제도기초위원회」가 실무조직으로 구성됐다.여기에는 당시 경제기획원의 이기욱국장(전 재무부차관) 이형구과장(전산업은행총재), KDI의 김만제원장(현포철회장), 박종기박사,보사부의 홍종관차관과 박준익국장, 사보심의 민재성실장(현국민연금관리공단 고문) 임흥달계장(전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 노동부의이상윤국장, 총무처의 장원찬 연금국장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일본 필리핀 태국 등 동남아국가를 돌며 그 나라의 연금제도를 직접조사한 뒤 요강안을 내놓기도 했다. 『외국의 여러 제도를 통해 좋은 점만을 선택해 연금제도를 도입하려 했다』는 것이 박회장의 말이다.그러나 『비록 연금제도입이라는 목적은 같았어도 내자조달목적의기획원·KDI측과 사회복지보장을 강조한 보사부·사보심측간에 인식의 차이가 있어』(박준익회장) 매주마다 열렸던 회의는 격론이벌어지곤 했다. 주연은 민재성고문과 박종기교수. 민고문은 보사부가 대통령에게 연두순시때 보고자료로 제출한「한국의 사회보장연금제도의 타당성연구」라는 책자의 주 자료원이었던 「우리나라 연금제도도입을 위한 기초연구」라는 석사논문을 낸 보사부측의 연금전문인이었다. 박교수는 미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사회보장에관해 공부한 유학파인재로 「Social Security in Korea」 등의 책자를 통해 중화학공업육성정책을 위한 내자조달의 방편으로 공적연금제의 도입을 역설한 기획원측의 대표선수였다.민고문의 회고. 『당시 보사부와 기획원측의 안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보사부측은 소득재분배와 사회복지기능을 강조한 국민복지연금(안)을 주장한 반면 기획원측은 자원의 효율성과 재정의 한계를중시해 소득비례의 국민연금(안)을 주장했다. 정부의 역할, 연금의종류, 재정적립방식 등에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며 기획원측에서는 국민연금을 일종의 사보험식으로 이끌어가는 제한적인 차원의국민연금안을 주장했다.』 그러나 박교수는 『기획원측의 안은 사회복지와 경제라는 두가지 목적을 노렸다』며 『연금은 사보험이될수 없으며 보사부가 기획원측에 비해 소득재분배기능을 강조했을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험요율책정에 관해서는 두 부처가3∼4% 보험요율이란 의견일치를 봤다. 그러나 『당시 기초자료와전문가가 없어 추산에 의해 3%를 책정』(민고문)했다는 보사부측과『KDI 전산실장이던 김대영박사(전건설부차관)가 각종 통계자료를이용해 보험요율책정은 물론 장기예측까지 했다』(박교수)는 말이엇갈리고 있다. 어쨌든 이때 두 사람은 비록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소속부처의 입장을 주장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때 만남을 계기로 나중에 『민실장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 KDI에서 함께 일하는 인연을 나누기도 했다』는 것이 박교수의 말이다.◆ 기금 징수·관리 이원화 무산돼기획원과 보사부 양측의 의견차는 법안통과 때까지 계속됐다. 덩달아 사회적으로는 국민연금이 중화학공업육성을 위한 재원조달수단으로 도입된다며 「앞뒤가 뒤바뀐 것이 아니냐」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크다」는 등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박교수는이에 대해 『당시 경제상황이 안좋은데다 실업보험이나 의료보험을먼저 실시해야 한다는 경제단체의 주장이나 사회적 여론이 팽배해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결국 국무총리실 주도아래 두 부처의 안이 절충된 전문 1백16조부칙 3조의 국민복지연금법(안)과 국민복지연금특별회계법(안)이확정돼 73년 12월 24일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사부안이 많이 받아들여진 조정안』이라는 것이 박교수의 말이다.산고 끝에 법률이 제정·공포됐지만 곧 바로 불어닥친 오일쇼크로국민연금의 시행은 계속 연기됐다. 제도연기에 대해 당시 보사부에근무했던 국민연금관리공단 정석주 교육홍보부장은 『당시 보사부에는 연금도입이 상당히 늦었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으며 그나마예정됐던 연금시행의 연기를 두고 상당히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보사부내에 가득찼었다』고 말했다. 반면에 『기획원측은 오히려 당시 경제여건이 나빠진데다 기업들의 강력한 연기건의로 제도시행의연기가 불가피한 분위기였다』는 것이 박교수의 말이다.법률공포후 12년간 잠들었던 국민복지연금법은 86년 수정보완을 거쳐 「국민연금법」으로 개정된 뒤 88년 비로소 제도로 시행됐다.그러나 주무부서였던 기획원과 보사부에서는 개정된 국민연금법에대한 불만이 없지 않았다. 보사부측에서는 사회보장과 보사부의 의지라는 차원에서 법률명에 「복지」라는 단어가 삭제된 데 불만이컸다. 『국민연금이라는 복지제도도입에 자긍심을 갖고 심혈을 기울였는데 막상 「복지」라는 단어가 빠지니 처음 입안당시의 의지가 많이 빠져나간 것 같다』(박준익회장) 『73년 첫 법안보다 많이약화됐다』(민재성고문)는 것이다. 기획원측으로서는 기금징수와집행·관리의 분리라는 당초 주장이 유야무야된데 다른 불만이 있었다. 박교수에 따르면 『보험료징수와 같은 중요한 일을 보사부에맡긴다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어 기금징수는 국세청, 집행·관리는보사부에서 하자는 안이 법률안으로 반영돼 국세청의 기구개편도이뤄지기도 했으나 막상 시행 때에는 유야무야돼 보사부가 전권을행사하게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