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값 폭락이라는 외생변수로 무역수지 적자를 설명한다면 책임전가밖에 안됩니다. 반도체 없이도 (무역수지를) 꾸려 나갈 수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국제수지를 개선하려면 정부나 기업이 모두 사고의 틀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지난 3월6일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은 취임식에 앞서 출입기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졌다. 산업정책을1백80도로 뒤바꿀 수 있는 얘기였다. 임장관의 화두는 경제장관합동기자회견(3월20일)과 김영삼대통령이 주재한 경제장관회의(31일)를 거치며 구체화됐다. 『대기업중심의 대규모 사업추진방식으로 경제활력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고용증가도 꾀하기 힘든만큼기술과 지식집약적인 기업, 즉 중소 벤처기업이 경제발전을 주도할수 있는 단계로 전환하겠다』는 것이었다. 각종 지원책이 봇물 터지듯 뒤이은 것은 당연했다.사실 벤처기업 지원책은 중소기업청에서 이미 준비중이었다. 『유망 벤처기업과 수출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대책을 수립해 추진하라』는 대통령의 지시(2월14일)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중앙부처가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앞으로 지원책이 어떤 강도로 추진될 것인지를 가름하기 위해 따져볼만한 대목이다.◆ “6조원, 한보대신 벤처기업에 갔더라면…”먼저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이나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등 새 경제팀의 색깔. 시장경제 신봉자들로서 대기업들도 부도날 수 있다는 논리를 펴온만큼 중소기업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강부총리가 최근들어 자주 펴는「새싹론」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된다. 한보 삼미 등 중견그룹들의부도도 한몫을 한 것으로 거론되고 있다. 대기업중심의 지원책에대한 회의감이 벤처기업 육성책의 도화선이 됐다는 것이다.실제 한보부도이후 과천 관가에서는 『6조원 가까운 돈을 벤처기업에 지원했더라면…』하는 탄식이 흘러 나왔다. 「한 업체당 1억원씩 지원하고 절반만 성공한다」해도 3만개의 벤처기업이 생겨난다는 계산에서였다. 물론 특정 품목이나 업체에 의존하는 우리의 수출구조에서 벤처기업이 갖는 안전판 역할도 지원책이 나오게 한 요인으로 짐작되고 있다. 통산부는 현재 『각종 지원책을 펴서 벤처기업숫자를 중소제조업의 20%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찬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다.지난해말 1천5백여개에 불과한 벤처기업의 숫자를 2001년까지 2만개, 2005년까지 4만개로 육성하겠다는 중·장기 비전이다. 계획 실현을 위해 분야별 지원과제(표참조)들을 선정, 관계부처와 협의를 벌이는 등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벤처기업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는 쪽으로 방침을 굳혔다.그러나 벤처기업 육성계획 자체가 중·장기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 지원책은 아직 설익은 부분도 많다. 밟아야 할 절차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벤처기업 전용의 3부시장을 설립하는 문제는 현재 오리무중이다. 벤처기업들의 직접금융이 가능해진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반대가 만만치 않다. 장외시장을 관리하는 한국증권업협회,증시를 운영하는 증권거래소도 마찬가지다. 장외시장이 활성화되지못한 상황에서 3부시장의 존재의미가 얼마나 될 것인지, 또 투자자보호차원에서 3부시장 상장요건은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도 문제다.액면가 하향조정 방안도 나왔지만 그래도 증권계는 떨떠름한 표정이다.통산부는 중소기업 연쇄부도 방지장치가 되도록 어음보험을 활성화하기 위해 재원확보 방안을 모색해 왔으나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예산지원이 불가피한 판국이지만 재정경제원의 반대논리도 강하다. 어음보험 사기행각을 막기 어렵고 그경우 예산낭비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관계부처와 협의를 거치고 관련법을 제·개정해야 하는 제도적 지원책은 조기 시행이 어렵다는 얘기다. 고수익 고위험(High Risk, High Return)인 벤처기업이 성공하려면 개발한 기술을 제때 활용하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보면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벤처기업 창업이 활성화되려면 엔젤(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개인투자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금융실명제를 보완해 엔젤에게 소득공제 혜택을 주고 엔젤캐피털(벤처기업 창업에 투자된자금)은 자금출처조사를 면제해 주기로 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구체화되고 있는 사항은 없다.기업평가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은 벤처기업 지원책의 「아킬레스건」이다. 벤처기업들의 보유기술이 제대로 평가해서 자산가치를 산출하고 그에따라 대출금의 규모등이 결정돼야 할 터이다.그러나 현재 국내 평가기관중에서 기술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란기대난이다.◆ ‘2005년까지 4만개로 육성’ 중·장기계획지원책속에는 벤처기업들을 온실속의 화초로 만들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창업이후 몇년만에 매출이 급신장되고 장외시장 등록후에는 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창업주가 엄청난 부를 보유하게된, 말그대로 성공한 벤처기업들은 그동안 아무 지원도 받지 못했다. 지원책이 없었기에 자생력은 더 뛰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기술개발 과정이나 개발된 기술을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갖가지 어려움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벤처기업을 우후죽순격으로 만들었다가 제대로 안되면 벤처기업 이미지만 나빠진다』『매출이 몇년만에 얼마가 늘고 장외시장에 상장된 주가가 올라 창업주가 떼돈을 벌었다는 식의 얘기가 떠돌면서 벤처기업이 버블화되고 있다.』벤처업계의 이같은 불만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정부가 추진중인 벤처기업 육성책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우리 산업의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 노력이라는 점에서, 또 불황의늪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벤처기업 지원책이 정(正)뿐만 아니라 부(負)의 효과를 갖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손잡이를 잡으면 물건을 자를 수 있지만 칼날을잡으면 손이 베이는 칼과도 유사하다. 앞뒷면이 판이하게 다른 동전과도 비슷하다. 따라서 지원책이 성공하려면 두가지 효과중에서정(正)의 방향만을 보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대상으로 한 과감한 시도」를 벤처정신으로본다면 부(負)의 효과는 무시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각종 부작용을 우려해 한걸음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정(正)의효과에 더 비중을 두고 강력하게 추진할 것인가. 벤처기업 지원책은 지금 정부 부처간에는 선택의 문제로, 우리 경제에는 어떤 선택이든 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시기의 문제로 다가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