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개에 이르는 거대한 계열기업군과 18만명의 종업원, 96년 수출1백52억달러에 연간 매출 72조원으로 국내경제의 17%(경상 GNP기준)를 점유하고 있는 현대그룹. 이런 거대 조직이 그룹회장 한사람의 힘으로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실제로 현대그룹은 그룹회장을 비롯한 창업자의 2세들이 전면에 포진해 있기도 하지만 수많은 전문경영인들이 그들을 보좌하면서 그룹 위상을 빈틈없이 지켜내고 있다.사장단회의에 참석하는 60여명의 회장단 및 계열사 사장단이 대표적인 경우다. 매달 두번씩 열리는 이 회의에서는 그룹의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진다. 그러나 사장단회의가 현대그룹의 최고의사결정기구는 아니다.현대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소수의 최고경영진들로 구성돼 있는 그룹 운영위원회. 7명으로 구성돼 있어 일부에서는 7인 운영위원회라고도 부른다. 현대그룹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이 자리에서이뤄진다.구성멤버는 정몽구 그룹회장을 비롯해 정몽헌 그룹부회장, 정몽규현대자동차회장, 박세용 그룹종합기획실장, 이내흔 현대건설사장,이익치 현대증권사장, 김정국 현대중공업사장이다.매달 셋째 월요일 정례회의외에도 주요 사안때마다 회의를 갖고 그룹의 주요 사안을 논의한다. 이 가운데 정몽헌그룹부회장 정몽규현대자동차회장 등 2세들을 제외하면 모두 현대건설에서 뼈가 굵은전문경영인들이다. 그룹 창립의 모체에서 일을 시작한만큼 그룹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다 건설업계 출신이어서 팔방미인들이다.◆ 정몽헌그룹부회장, 실질적 제2인자정몽헌 그룹부회장은 정명예회장의 5남. 현대전자 현대건설 현대종합상사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정보기술 금강기획 등 8개 계열사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룹의 실질적인제2인자다.학창시절 「샌님」으로 불렸을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기업을 맡아서는 부친인 정명예회장까지 높게 평가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정명예회장은 당초 섬세한 그의 성격이 전자같은 업종에 맡겠다 싶어 현대전자를 맡겼다는 후문이나 오히려 통큰 경영으로 사업을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대선 여파로 영어(囹圄)의 생활을 하면서도16메가D램 투자를 결정했을 정도로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다. 미국등 해외에 공장을 진출시킬 때는 그룹 원로급 임원들도 감탄했을정도다. 87년 1메가D램을 독자 기술로 개발하면서 경쟁업체보다10년 뒤졌던 기술력을 따라잡고 94, 95년 대규모 이익을 내면서 정명예회장으로부터 확실한 신임을 얻었다.그는 일본식 경영을 앞세우는 대부분의 대기업 경영자와는 달리 미국식 경영을 선호한다. 미국에 세운 기술개발업체에서 실시하긴 했지만 국내업계 처음으로 스톡옵션제를 도입한 것도 그가 미국식 경영에 익숙하다는 증거다. 경영은 대부분 사장에게 위임하는 스타일이지만 큰 줄거리는 스스로 만들어 간다.정몽규 현대자동차회장은 연간 매출 13조원의 그룹내 최대 제조업체를 이끌고 있다. 88년 자동차에 대리로 입사해 90년 이사, 91년상무, 93년 부사장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한 그는 부친인 정세영 그룹회장이 자동차명예회장으로 물러난 것과 동시에 회장자리를 맡아자동차 살림을 챙기고 있다. 62년생으로 아직 35세에 불과한 나이여서 50대 임원들이 처음에는 경영능력에 의구심도 가졌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탄을 할 정도로 매끄러운 경영수완을 발휘하고 있다.그런 이면에는 정세영 명예회장으로부터 혹독한 경영수업이 있었다. 8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회사의 주요포스트를 모두 거치는하드 트레이닝으로 본사는 물론 울산공장에서도 모르는 업무가 없을 정도다.혹독했던 경영수업 기간동안 습득한 노하우는 회장취임과 함께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회사의 인사체제를 대폭 뜯어 고치고 대대적인 원가절감운동에 나서는 등 체질개선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 그런 사례다.지난해 12월 노동법개정에 대한 노조의 불법파업에 「휴업」이라는정면돌파의 해법을 제시하는 과단성도 갖고 있다. 대외활동에서도이런 수완이 그대로 발휘돼 한국자동차공업협회 회장으로 선임된직후 정부에 자동차업계의 어려움을 앞장서 호소하는 등 업계의 간판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박세용 그룹종합기획실장은 그룹의 전체적인 살림도 도맡아 하고있지만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상선의 사장직도 맡고 있는 그룹내 팔방미인이다.현대그룹 경영자들이 대개 거구인데 비해 작은 체구지만 「작은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당찬 경영인이다. 비상한 기억력과 과단성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67년 현대건설에 입사한그는 주로 정명예회장 밑에서 해외공사 수주업무로 잔뼈가 굵은 해외통이다. 특히 70년대 현대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사우디 아라비아주베일항만공사 수주때는 영업부장으로 맹활약해 정명예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건설 중공업 종합상사 상선 등 그룹의 주요 계열사를 두루 거친 그는 92년 대선당시 국민당 사무총장 특보를 맡아 옥고까지 치른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차돌같이 차가운 인상이지만 회식자리에서는 「폭탄주 제조」를 도맡아 좌중을 주도하는 친화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정보화시대의리더십은 누구와도 직접 대화채널을 가질수 있는 「열린 경영」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컴퓨터를 통해 말단사원과도 대화하는 열린 경영인이다.이내흔 현대건설사장은 현대그룹의 마당발이다. 그룹의 힘든 일이있을 때마다 앞장서 뛰어 다니는건 그의 몫이다. 지난해 3개월동안현대산업개발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을 제외하곤 70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후 줄곧 현대건설을 지켜왔다.선이 굵고 친화력이 뛰어나다. 사우디 아라비아 주베일공사때는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의 자재업무를 총괄하면서 해상터미널 철재재킷을 울산에서 주베일항구까지 6천7백50마일이나 옮기는 해상수송대작전의 총사령관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정명예회장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14대 총선에서는 정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종로에서 출마해 낙선한 경험도 갖고 있다.◆ ‘작은 불도저’ 박세용 종합기획실장이익치 현대증권사장은 69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후 현대엔진 현대중공업 현대해상화재를 두루 거쳤다. 정명예회장의 비서를 맡은경력이 있다. 정명예회장의 복사판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만큼 정명예회장을 측근에서 보좌한 경험이 있어서다.새벽에 일찍 출근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하다. 매일 오후 5시부터 열리는 정보회의가 끝나면 사원 대리와도설렁탕을 먹으러 다녀 「설렁탕회의」라는 얘기가 만들어질 정도로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다. 술과 담배는 전혀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자기관리 능력이 뛰어나며 사심없는 경영자로 잘 알려져 있다. 건설과 제조업에 오래 몸담았던 경험이 있어 『경쟁국과 같은 수준의금리를 조달해야 제조업이 산다』며 제조업을 위한 금융발전론을펼친다. 현대그룹 금융업종의 싱크탱크다.김정국 현대중공업 사장은 66년 공채로 입사한 뒤 현대건설 사장과회장, 인천제철 회장을 거쳐 93년부터 현대중공업사장을 맡고 있다. 워낙 현장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데다 시간만 나면 현장을 둘러보는 철저한 현장주의자다.노사분규의 핵이던 현대중공업을 맡아 타고난 친화력과 직원들의경조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열성으로 위기를 넘기는데 큰 역할을해냈다. 스스로 노사문제 전문가로 자부하고 있을 정도다. 꾸밈이없고 소탈해 노조원들로부터 「헐헐헐」(웃음소리)이라는 애칭을들을 정도다. 그러나 임원들에게는 철저한 카리스마형. 현대중공업대주주인 정몽준의원의 대리인 역할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