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복판을 관통하는 청계천은 중소상인이나 소비자들에게 해결사로 통한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갖추어놓고있기 때문이다. 첨단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의류 신발 서적 조명기구 등 없는게 없을 정도다. 여기에다 물건값도 시중에 비해 적어도 20~30%쯤은 싸다. 소매값이아닌 도매값으로 거래되는 까닭이다. 가히 소비자의 천국이라 할만하다. 그런 청계천이 사실은 또 하나의 타이틀을 갖고 있다. 바로성상품의 메카로 이름이 높다는 점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성과 관련된 상품을 구하려면 청계천에 가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다. 특히 청계천 상권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세운상가는 국내 최대의 섹스숍 상가를 이루고 있다.청계천에 성상품이 상륙한 것은 지난 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누드집과 성용품이 은밀하게 거래되기시작하면서 자리를 잡아 나갔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찾는 사람이많지 않아 열기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공급 역시 특정 루트를 통해 이루어져 거래 자체가 은밀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그러다가 80년대를 거치면서 청계천에 변화의 기운이 밀어닥쳤다.세운상가에 정식으로 허가받은 비디오가계가 출현, 포르노필름과성용품 등 성상품을 취급하면서 지하에 숨어있던 것이 지상으로 나오는 계기가 됐다. 물론 비디오가게에서 포르노필름 등을 파는 행위는 불법이었다. 실제로 단속도 끊이지 않았다.◆ 세운상가, 20~30% 싸게 판매그러나 업주들은 가게의 한 구석에 슬쩍 숨겨놓고 아름아름 찾아온고객들에게 다양한 성상품을 팔았다. 손님을 모셔오는 일명 삐끼들도 활개를 쳤다. 이 당시 최고의 인기상품은 단연 포르노필름이었다. 세운상가의 섹스숍은 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특히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VTR가 대거 보급되면서 포르노필름이 날개돋친듯 팔렸다. 상가에는 쇼핑 나온 사람들이 넘쳐났고 야한 빛을띤 제품들도 덩달아 대목을 맞았다. 이런 인기를 반영하듯 좁은 상가안에 누드집이나 포르노필름을 리어카나 좌판에 벌여놓고 고객을부르는 사람들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또 상가안 으슥한 곳에서는포르노필름이 상영되기도 했다. 서울 한복판에 포르노극장이 실제로 존재했던 셈이다.지방손님도 많았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 시대만 하더라도 아주 은밀하게 거래된데다 지방에는 취급하는 곳도 거의 없어 세운상가를 많이 찾곤 했다. 세운상가에서 올해로 10여년째 일을 하고 있는 김모씨는 『세운상가에는 국내에서 거래되는 모든 성상품이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여러가지 요인 때문에 약간 주춤해진 느낌』이라고 말한다.실제로 세운상가는 요즘 전체적으로 생기가 없어 보인다. 80년대의호황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 상가사람들의 설명이다. 성을 파는점포들 역시 덩달아 과거의 명성(?)을 서서히 잃어가는 분위기다.세운상가가 최근 들어 약간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여러가지측면에서 풀이할 수 있다. 우선 전체적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많이 줄었다. 세운상가는 과거 용산에 전자상가가 생기기 전까지만해도 전자상품의 중심지로 이름이 높았다.그러나 전자상가가 문을 열고 각지에 다양한 형태의 상가가 출현하면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연 사람들의발길이 전에 비해 상당히 뜸해졌고 성상품을 파는 상인들도 큰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다 사회 전반에 걸쳐 성상품이 폭넓게 퍼진 것도 세운상가의 영향력을 줄이는데 한몫했다. 굳이 청계천에 가지않아도 웬만한 것은 수소문만 하면 거의 구할 수 있게 된 까닭이다. 특히 최근 들어 체인점 형식의 섹스숍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문을 열면서 세운상가의 역할은 상당히 위축되는 느낌이다. 세운상가의 한 직원은 전성기에 비해 매출이 절반 이상 줄었다며 당분간 경기가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몇년전부터는 지방에서 올라오던 손님들도 딱 끊겼다.그러나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하듯 세운상가는 여전히 성상품 메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양한 상품을 갖추고 있을 뿐만아니라 가격도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저렴하다. 큰 차이가 있는것은 아니지만 대략 20~30%쯤은 싸게 판다.또 최근에는 다양한 대고객 서비스도 펼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인 셈이다. 화질이 나쁜 것을 교환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쓰던 것을 갖고 와서 다른 것으로 바꿔갈 경우3분의 1 가격에 준다. 쓰던 전자제품을 새 것으로 바꿀 때 중고품에 대해 일정액의 돈을 되돌려 주는 것과 같은 식의 마케팅을 하는것이다.◆ 불황파장 점포당 하루 5명 내외 손님뿐호객행위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하나만 사달라고 노골적으로 협박성 부탁을 하곤 했으나 요즘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업주들은 주변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봤자 괜한 오해만 사게 돼 오히려영업을 하는데 부담만 생긴다고 털어놓는다.고객들의 태도 역시 최근 3~4년 사이 많이 변했다. 슬그머니 찾아와 누가 볼세라 얼른 사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상당히 떳떳해졌다.사회적으로 성에 대한 거부반응이 점차 없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여성이나 부부들도 가끔씩들른다는 점이다. 물론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낮지만 별거리낌없이 상가에 들러 포르노필름이나 기구 등을 사간다. 변화된세태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소비자들의 요구도 아주 다양해졌다.문제가 있으면 즉각 반환을 하고 새것을 요구한다. 또 때로는 새로들어온 「따끈따끈한 것」이 없냐며 문의를 해오는 사람들도 더러있다.세운상가에는 현재 가동과 나동을 합쳐 약 50~60개의 성상품 전문점이 영업중이다. 또 그 주변에 텐트를 치고 영업을 하는 20여군데의 노천섹스숍이 있다. 상가내 점포는 대략 3~4평의 아주 작은 규모로 대부분 허가를 받지 않고 영업을 하는 까닭에 외관상으로는구분이 가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가게와 전혀 다르지 않다. 간판도 OO상사 식으로 돼 있다. 대부분 전자제품이나 액자를파는 가게로 위장을 하느라 이런 상호를 쓰고 있다. 물론 실제로겸업을 하는 곳도 있다. 취급하는 제품은 가장 일반적인 포르노필름을 비롯해 CD롬 발기의약품(일명 칙칙이) 성기구 성인만화 성인잡지 등 아주 다양하다.최근에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듯 CD롬을 사가는 사람들이 크게 느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거의 전부 불법 복제품들이다. 중간에 불법으로 복제하거나 수입해주는 업자들이 있어 물건을 공급받는다. 마진은 대략 50%를 넘는다는 것이 상인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물건을 사가는 고객수는 점포당 하루 평균 5명 내외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수십명씩 찾아왔으나 최근에는 많이 줄어든 상태다.20~30대의 젊은층이 약 70%를 차지하며 주류를 이루고 나머지는40대 이후의 중장년층이다. 세운상가에서 성상품을 파는 사람들은 요즘 깊은 시름에 싸여있다.사회적인 변화에 밀려 불황에 시달리면서 새로운 업종으로의 변신을 신중히 모색하고 있다. 한 상인은 매출이 전성기 때의 30%에 불과하다며 이런 이유 때문에 최근 들어 이곳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 청계천이 아직은 성상품 메카로서의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앞으로 3년쯤 후에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전한다. 편의점에서 콘돔을 파는 등 성상품을 취급하는 곳이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세운상가의 한 관계자는 『섹스숍 때문에 상가의 전체적인이미지가 나쁜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이들 점포를 정리하는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라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