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시장에는 두개의 문이 있다. 장미빛 꿈에 부풀어 들어오는 문과 다 털리고 쫓겨 나가는 문이다. 한쪽 문으로는 유통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며 계속 들어오고 한쪽 문으로는 유통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경험하고 쫓겨 나간다. 그만큼 새로 진입하는업체도 많고 망해나가는 업체도 많다.올들어 진로(아크리스백화점 등) 대농(미도파) 한신공영(한신코아백화점) 태화쇼핑(태화백화점) 등 4개의 유통업체가 부도를 냈거나부도위험에 처했다. 이중 유통을 주력으로 하던 대농만 다른 사업체를 매각, 유통사업을 살리겠다고 선언했고 나머지 업체는 유통을거의 포기한 상태다. 진로나 한신공영은 가지고 있던 백화점 건물을 매각하려고 내놓았다. 부산의 토착 백화점인 태화쇼핑은 법정관리를 신청했지만 업계에서는 태화쇼핑이 회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전망하고 있다.유통업체의 몰락은 어제 오늘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지난해 부도를 냈던 건영건설의 건영옴니백화점을 비롯, 그 이전의한양쇼핑(한양그룹)과 라이프쇼핑(라이프건설) 센토백화점(모아유통)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파산한 중견 유통업체의 숫자는 10여개에이른다. 단지 올해 들어 위기에 직면하는 유통업체들이 많아졌다는게 이전과 다를 뿐이다.◆ 한양쇼핑 등 파산한 중견유통업체 10여개올해 유통업계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뉴코아와 나산의 최근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유통만으로 재계 30위안에 진입, 유통왕국을 건설해오던 뉴코아는 최근 끊임없는 위기설 속에 구조조정에 나섰다. 2000년까지 전국에 총 96개의 백화점과 할인점을 건설, 유통을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육성하겠다던 나산그룹도 유통사업 계획을 변경했다. 백화점 사업은 포기하고 할인점에만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불황으로 백화점을 건설할만한 큰 돈을 구하기가 힘들어졌다는게 첫째 이유다.그러나 파산하거나 위기에 봉착, 힘겹게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업체가 있는 반면 「그래도 유통을 하겠다」며 유통시장에 뛰어드는 업체도 줄을 잇고 있다. 올들어서만 삼성 대우 거평 신동방 효성 코오롱 등이 백화점이나 할인점을 하겠다며 유통산업 진입을 선언했다. 삼성의 경우 올해에만 경기 분당에 복합쇼핑센터인 「메가포트」, 대구에 슈퍼센터 「홈플러스」, 삼성본관 지하에 의류 사무용품 전문점인 「삼성플라자」 등 3개의 대형 유통매장을 개점한다.대우는 경남 마산시의 20층 복합건물 시티랜드를 대형백화점으로용도를 바꿔 연내에 개점한다. 우성건설이 부산에 세웠던 리베라백화점 인수도 추진하고 있다.거평은 이미 광주에 할인점인 「거평마트」를 열었고 신동방은 서울 목동에 하이퍼마켓 개점을 준비 중이다. 코오롱상사는 의정부시산곡동에 할인점 「다마트」를, 효성은 대구에 할인점 「효성마트」의 개점을 준비하고 있다. 중견 건설업체인 동성토건도 수원에할인점인 「동성D마트」 1호점을 오픈한다.이외에 다른 주력사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백화점이나 패션전문점을하나 혹은 두개씩 소유하고 있던 업체들도 유통을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키우겠다며 본격적으로 유통시장에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안양에 벽산쇼핑을 가지고 있던 벽산건설은 올해 12월 전주에 패션전문점인 「일이오」를 시작으로 유통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LG와미원도 본격적인 유통사업 추진을 결의했다. 유통을 안하면 큰일이라도 날듯 너도나도 뛰어든다.한쪽에서는 망해나가고 다른 한쪽으로는 계속 들어오는 셈이다. 한쪽에서는 유통을 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쫓겨나가고한쪽에서는 유통이라는 미래의 「노다지」 산업을 바라보며 신규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통을 손댔다가 망한 업체는 왜몰락한 것이고 기존 유통업체들의 파산을 보면서도 기어코 유통업을 하려는 업체들은 왜 그런 것일까.기업들이 유통업에 진출하는 이유는 대략 3가지다. 첫번째는 아파트를 건설하면서 아파트 단지에 백화점까지 건설, 유통산업에 진출하게된 경우다. 주로 건설업체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예는70년대 후반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한신코아(한신공영)벽산쇼핑(벽산건설) 건영옴니백화점(건영건설) 블루힐백화점(청구건설)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현대백화점이나 뉴코아도 70∼80년대에 아파트 단지에 백화점을 건설하면서 유통업에 진출한 케이스다.두번째는 도시 외곽에 자리잡고 있던 공장 시설을 지방이나 해외로이전시키고 남은 공장 유휴지를 활용, 유통시설을 건설하는 경우다. 경방이 영등포 공장을 이전하면서 세운 경방필백화점이 대표적이다. 공장 유휴지는 아니더라도 놀리던 땅에 백화점을 건설하는사례는 많다. 애경산업이 서울 구로에 애경백화점을 건설한 것도마찬가지 사례다.세번째는 사업다각화 측면에서 진출하는 경우다. 정보통신 레저산업 등 여러 가지 미래 유망산업 중에서도 유통은 별다른 노하우나큰 돈 없이 비교적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판단, 뛰어드는 경우다.한양유통을 인수, 유통업에 진출했던 한화나 진로, 95년부터 공격적으로 할인점 매장을 늘리고 있는 대한통운이 여기에 속한다. 최근 유통산업 진출을 선언하는 업체들도 대부분 여기에 해당된다.그러나 유통이 과연 많은 업체들이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대로 땅만있으면 비교적 쉽게 진출, 돈을 벌수 있는 사업일까. 최근 큰 유통업체들의 잇단 몰락에서도 알수 있듯 「유통=장사=누구나 할수 있는 사업」이란 발상은 이제 위험천만이다. 잘못하다간 유통으로 망하기 십상이다.◆ 첨단정보시스템·고급인력·자금이 열쇠한국백화점협회의 박정식이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사라 하면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유통은 단순한 장사가 아니다』라고말한다. 첨단 정보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시스템 산업이자 고급 인력이 필요한 두뇌산업이라는 지적이다. 판매가 되는 즉시 얼마를팔았고 재고는 얼마고 이익은 얼마 남는지가 척척 나오는 최첨단장비를 갖추지 못하면 유통산업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전자시스템 비용이 전체 건축비의 20∼30%에 달하는게 현실이다.문제는 큰 돈을 들여 이 장비를 갖춘다 해서 끝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모 유통업체에서 큰 돈을 들여 정보시스템을 갖췄는데 시스템을 운영할 전문가가 없어 오랫동안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했다는 웃지못할 얘기가 있다』고 말한다. 최근 2∼3년간 유통업체가 급증,유통 전문인력이 부족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주체도 결국은 사람인데 유통에 대한 노하우를 가진 전문가없이 유통을 시작하는 업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유통에서 성공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그러나 정작 유통산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백화점 하나 세우는데 2천억∼3천억원, 할인점을 하나짓는데 5백억원 이상이 든다는게 정설이다. 이 돈을 은행에서 빌려다 투자한다고 하자. 할인점의 경우 연간 금리부담만 70억원, 백화점은 3백억∼4백억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백화점의 경우 매출이익률(마진)은 22∼23%. 여기에 판매관리비를 제외한 영업이익은6%가량이다. 결국 연간 3백억원의 이자를 지불하려면 연간 5천억원이상의 매출액을 올려야 한다. 그래야 겨우 「똔똔」을 맞출 수 있는 수준이다. 1개 점포에서 연간 5천억원을 올리는 백화점 매장은전국에서 1∼2개에 불과하다. 게다가 백화점이 늘어나면서 점포당매출액과 이익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웬만한 자금력을 갖춘 기업이 아니라면 백화점 사업은 꿈도 꾸지 말 일이다.◆ 유통매장은 늘고 업체는 준다할인점은 더 심하다. 앞으로 백화점을 누르고 유통업계의 꽃으로성장할 것이라는 화려한 말들을 듣고 있지만 할인점의 매출이익률은 11.3%로 백화점의 절반 수준이다. 영업이익과 경상이익이 각각3.9%와 1.5%. 단적으로 말해 1천원어치 팔아봤자 15원 남는 장사다. 투자비는 엄청난데 비해 마진은 턱없이 적다. 그야말로 투자비를 회수하려면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손익분기점을 지날때까지 견딜 수 있는 튼튼한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유통업체들이 최근 잇달아 넘어지고 있는 것도 투자비는 많이 드는데 벌어들이는 돈은 투자비를 감당할만큼 많지가 않기 때문이다.돈 빌려서 건물만 지어 놓으면 투자비 회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것으로 기대했는데 생각만큼 많이 남지 않고 금융부담 때문에 빚만쌓이다가 결국 몰락하게 된다.그러나 아직까지 유통산업에 기회는 있다. 대한상의 유통과의 노금기과장은 『참여하는 업체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선진국에 비해유통매장이 많은 것은 아니다』라며 『유통매장은 더 늘고 업체는줄어드는 식으로 정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몇몇 경쟁력있는업체만 살아남아 유통시장을 독식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다. 유통산업의 기회도 시스템과 전문인력 자본력을 갖추고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업체에만 있는 셈이다. 마지막 열매는 달지만 그때까지의 독은 너무 쓰고 치명적일 수 있어 결국 유통이란 함부로 할 일은 아닌 것이다.★ 몰락의 현장 - 노원구 백화점들모기업 부도 여파, 노른자위 점포 '흔들'「노원구 백화점들의 수난시대」.서울의 핵심상권 중의 하나로 꼽히는 동북부 지역 백화점들이 비슷한 시기에 기구한 운명에 처했다. 노원구 중계동의 건영옴니백화점, 상계동의 미도파백화점, 하계동의 한신코아백화점 등 3개 백화점이 모두 모그룹의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공교롭게도 노원구 3개 백화점들이 동시에 「불운」을 만나긴 했지만 이 지역이 장사가 안되는 상권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 2∼3년새새롭게 부상하는 핵심상권으로 대부분의 유통업체들이 탐내는 지역이다. 실제로 이 지역 상권은 중·상계동 지역을 중심으로 멀리는방학동 쌍문동 수유리 등 인근 도봉지역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상권이다. 인구만해도 중·상계지역에 60만명, 2차 상권인 도봉지역과의정부지역을 포함해 2백만명에 이른다. 게다가 부근에 큰 유통업체가 없었던 탓에 이 지역에 둥지를 튼 유통업체들은 모두 서울의다른 지역 백화점들보다 훨씬 높은 매출신장률을 자랑해왔다.지난 88년 백화점 불모지였던 하계동 한신아파트 단지 내에 처음으로 세워진 한신코아백화점의 경우 개점 초기에는 연평균 50∼70%의신장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신코아는 땅값이 비싼 도심지역에는백화점 건립이 어렵다고 판단, 외곽 아파트단지를 공략했는데 이전략이 주효했던 셈이다. 95년부터는 경기 침체와 할인점의 출현으로 매출이 둔화돼 매출신장률이 5∼6%에 그쳤지만 1백여억원 가량을 영업이익으로 남겨 그런대로 괜찮은 장사를 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대농그룹이 부실징후기업으로 선정되는 바람에 영업에 타격을 받고있는 미도파 상계점도 92년 9월 개장한 이후 미도파의 매출신장을선도해온 알짜배기 매장. 올해도 신동방의 적대적 M&A(기업 인수합병) 도전과 불황에도 불구하고 5월말까지 1천6백99억원의 매출액을 올려 전년 동기대비 12.3%의 신장률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도 지난해의 경우 3백56억원으로 성공적이란 평가를 들었다. 91년 개점한 건영옴니백화점도 지난해 8월 건영이 부도를 내기 전까지는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렸던 백화점이다.결론적으로 노원구 백화점들은 수익이 괜찮은 노른자위 점포들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모그룹들이 모두 부도를 내거나 부도위기에처해 오해를 사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지난 94년에 이 지역의센토백화점이 부도를 냈던 전력을 들먹이며 「지세」가 너무 센 게아니냐는 평까지 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노원구 백화점들의뚜렷한 자금 조달 계획없는 방만한 차입경영이 장사를 잘하는 점포까지도 비운에 빠뜨린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