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씨(36)는 용산전자상가에서 「(주)사람과 셈틀」이라는 중간정도 규모의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컴퓨터인」이다. 선인상가 4층에서 직원 9명과 함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도 하고 하드웨어도만들며 컴퓨터 조립판매도 한다.용산에 매일같이 출근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부터지만 이 계통에 발을 들여놓은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따지기 쉽지 않다.프로그램을 손수 짜고 컴퓨터를 설계하며 주변기기를 개발한 것으로 치면 80년대초부터다. 그러나 라디오나 전축같은 기기에 관심을 갖고 청계천과 세운상가를 즐겨 찾던 초등학교때부터 기산하면 20년은 훌쩍 뛰어넘는다.소프트웨어든 하드웨어든 개인용 컴퓨터에 관한 한 그는 기술 코치로서의 자격이 차고 넘칠 정도다. 그는 「컴퓨터 귀신」들이 모여있다는 선인상가에서도 기술 자문위원으로서 이런저런 컨설팅에 응해주고 있으며 하이텔 파워유저의 모임인 OS(운영체제) 동호회에서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 각종 컴퓨터 전문잡지의 「하드웨어 리뷰(제품 평가)」면에 대한 조언자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전자 전기 기술 축적이런 경력을 보면 김정기씨가 컴퓨터 전공의 대단한 학력을 지닌것으로 알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의 학력은 용산전자상가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용산공고 졸업이 전부다. 전공도 전자과가아닌 전기과다. 따라서 그가 갖고 있는 컴퓨터 기술은 순전히 기계일반에 대한 기본적 지식, 독학, 그리고 「야전 경험」을 통해 닦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컴퓨터 지식은 얼마나 빨리 컴퓨터와 접하느냐로 가름되는데 이점에 있어서는 약간의 행운도 따랐다.김씨가 개인용 컴퓨터를 처음 접한 것은 첫 직장인 가발공장에 다니던 82년이었다. 인생의 물줄기를 바꿔놓게 되는 그 문제의 컴퓨터는 일본인 바이어가 선물해 준 NEC 8801이라는 기종으로서 당시개인용 컴퓨터는 극히 일부계층에게만 소개되어 있을 때였다. 당연히 이 기계를 다룰줄 아는 사람이 있을리 없었다. 먼지만 뒤집어쓴채 사장실에 덩그러니 놓여있기만 하던 이 기계를 사장은 김씨 개인 소유로 해줬다. 김씨가 컴퓨터에 관심있어한다는 점과 직무 성실성을 높이 산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사내 최고의 엔지니어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 컴퓨터는 지금처럼 프로그램이 패키지화되어 있는 것도아니고 달리 매뉴얼도 없었다. 사용자 스스로가 프로그램을 짜서구동시켜야만 했다. 김씨는 어렵게 외국서적을 구해다가 베이직이니 코볼이니 하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웠다.그는 컴퓨터에 흠뻑 빠졌다. 삶의 진로를 발견한듯한 김씨는 좀 더깊이 공부하고 싶은 욕망에 아예 프로그램 개발 회사로 옮긴다. 게임 프로그램을 짜려면 기계어를 다룰줄 알아야하기에 보다 고급인C언어 세계로 들어갔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컴퓨터 구조학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하드웨어까지 영역이 넓혀지면서 김씨는 하드웨어를구동시키는 펌웨어도 손수 짤수 있게 되고 최종 사용자를 위한 기본 프로그램도 개발해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원래 기본기가 충실한데다 설날과 추석 이틀만 쉬고 일년 3백63일을 일하는 열정은 김정기라는 이름을 단기간에 절정고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몇가지 실적을 보자.◆ 저작권 보호등 S/W발전기반 마련돼야88올림픽을 앞두고 태권도를 홍보하기위해 파괴력을 시험하는 프로그램이 요구됐다. 파괴 강도를 수치로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고,보호대를 만들려면 가장 강력한 뒤돌려차기를 당했을 때 파괴력이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야하는 필요성도 있었다. 김씨는 푹신푹신한샌드백 같은 데에 센서를 부착하는 방식으로 원보드(One Board) 컴퓨터를 개발, 운동선수의 근력측정 시스템을 만들었다. 서소문 중앙일보사 전면에 있는 초창기 전광판 시스템도 김씨의 작품이다.이 시스템은 글과 흑백 동영상 처리가 가능해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또 내무부의 민방위 시스템인 사이렌 네트워크,포항제철의 수분 보정 시스템, 서울대병원의 무인 필름 전송장비등이 모두 그의 손길을 거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들이다.김씨는 90년 가산전자에 입사, 순국산 통합보드로 명성이 높은 윈엑스 퍼펙트(WinX Perfect) 시리즈 개발의 주역으로 활동한다. 그리고는 뜻한바 있어 93년 가산을 퇴사하고는 용산에 둥지를 틀기에이른다.비록 10평도 채안되는 점포 수준에 불과하지만 「사람과 셈틀」은굵직굵직한 아이템들을 많이 개발해냈다. PC내장형 FM 스테레오 카드, 펜타곤 FX 메인보드, 온에어(On-Air) TV카드 등등. 이 가운데메인보드는 자체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대기업을 제외하면 중소기업제품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며 온에어 TV카드는 기능과 화질면에서 외국산보다 훨씬 뛰어난 것으로 결론이 나있다. 요즘에는 기존ISA방식에서 진일보한 PCI 방식의 사운드 카드 개발을 끝내고 시판을 준비중이다.용산에서도 손꼽히는 컴퓨터 전문가로 자리를 굳혔고 회사규모도일정한 수준에 올라왔지만 정작 김씨 자신은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 그는 4년전 가산전자에서 나올 때 받던 봉급 1백90만원을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 집도 없이 14평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차도연식이 오래된 엑셀을 그냥 몰고 다닌다. PC 조립을 위해 찾아온고객에게는 가격이 비싸더라도 정품을 권하며 꼭 필요한 기능이 아니면 장착하지 말라고 말한다. 심지어 자기 회사제품도 고객의 사용목적에 맞지 않으면 필요없다고 할 정도다.안정된 직장을 마다하고, 더구나 사실상의 2인자로서(기술적으로는1인자) 얼마든지 자신의 꿈을 펼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험하디 험한 용산에 제발로 걸어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용산은「실패한 사업자가 떨어뜨리고 간 돈을 먹고 산다」라고 할 정도로변화무쌍하고 위험부담도 큰 곳인데.『어차피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기술밖에 없습니다. 기술 없으면살아남지 못한다는 각오와 생활신조로 오늘까지 버텨왔는데 뭐가두렵겠습니까. 어차피 이 분야는 용산에서 배워야합니다. 또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더 넓은 분야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보장이기도 합니다.』그는 어느 분야든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는철학을 갖고 있다. 일단 한번 미치면 가속도가 붙게 되고 그러는과정에서 전문가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그렇게 열심히 하려는 경향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아쉬워하고 있다.그러면서 그는 사회적 구조에도 책임의 일단이 있다고 말한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해봐야 저작권이 인정안되는 풍토니 누가 힘들여개발하겠는가, 대기업이 작은 부품 하나 국산을 사주지 않으니 어느 제조업자가 그 물건을 만들려고 하겠는가.『그래도 배운 재주가 이것밖에 없으니 이길로 가렵니다. 소프트웨어보다는 하드웨어 제조쪽에 힘을 두고 수출에 승부를 걸 계획입니다. 수출강화해서 경쟁력 갖추면 내수는 자연히 생기리라 봅니다.제 기술이 국가 산업에 보탬이 되고 직원들이 자부심 갖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워낙 「없이 살아오는데 단련이 됐기 때문」에 IMF도 무섭지 않다는 김씨. 그는 남들이 손쉬운 유통쪽으로 머리를 돌리려는것과는반대로 그들이 골치 아파하는 제조업을 끝까지 고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