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 미국 뉴욕 맨해턴의 유니버시티 클럽에서는 코리아소사이어티(회장 도널드 그레그 전주한미국대사) 주최로 「IMF 체제하의 한국 - 새로운 도전과 기회」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다.한국 정부의 경제 자문역을 맡고 있는 제프리 셰이퍼 샐로먼 스미스 바니 증권 부회장(전 미국 재무부 차관)을 비롯, 로버트 호매츠골드만 삭스 부회장 등 미국 내의 내로라 하는 한국 전문가들과 박영철 금융연구원장 등이 참석한 이날 세미나는 한국의 「IMF 신탁통치체제 1백일」을 하루 앞두고 열렸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관심을모았다.세미나에서 미국측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의 모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고질적인 관료들의 규제 행정을 빗대 『한국에서기업하는 것은 총탄이 쏟아지는 참호 속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trench warfare)과 같다』는 질타도 나왔다. 기업 자금을 개인 호주머니 돈처럼 이용하는 일부 재벌 총수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매서운 채찍질이 가해졌다.미국 전문가들은 그러나 한국의 궁극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적전망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은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를극복해낼 수 있는 근면하고 우수한 인적 자원을 다수 확보하고 있다는 데 특히 주목했다.미국 전문가들의 주요 강연 내용을 지상 중계한다.◆ 레이몬드 데이비드(Raymond David) 리먼 브러더스 수석 부사장= 요즘 한국의 대기업들도 최고 재무책임자(CFO=Chief FinancialOfficer)제도를 도입해 이들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CFO가 하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다. 미국 기업들처럼 건전한 재무제표를 작성해 기업의 원활한 회계를 기록하고 유지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관치 금융이라는폐습을 악용해 안면 있는 은행 관계자들과 접촉하고 담보도 없이융자를 받아내는 데 내몰리고 있지는 않은가.한국의 대기업들은 스스로를 위해서도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의 고리를 끊고 재무구조의 투명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구조 조정의 길을 선택해 문어발식 확장 대신 효율적인 기업 경영으로 내실을 다지는 것만이 새로운 시대에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케네스 리트(Kenneth Leet) 골드만 삭스 전무 = 한국은 해외 기업인들에게 투자하기에 가장 어려운 나라로 인식돼 왔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세계 기업들이 한국에 투자하기를 원하는 것은 한국이 질 높고 근면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최근 미국을 비롯한 상당수 외국 기업들이 한국 기업 인수(M&A)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 역시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한국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해 글로벌 시대의 세계적인 기업들이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적인 기술력과 마케팅 노하우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삼성자동차의 경우 단독으로 자동차를 생산해 세계시장에서 판매할 경우 고전이 불가피할 것이다. 앞선 기술과 마케팅력을 가진 제너럴 모터스(GM) 도요타 등과 경쟁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다. 따라서 합작을 타진하고 있는 포드 등과 손잡고 세계시장에진출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라고 본다.외국산 제품을 배척하고 국산품만을 애용해야 한다는 그릇된 애국심을 가진 관료들과 국민은 한국의 경제 개방에 큰 장애물이다. 주한 미국 기업인들은 한국에 있어 정치보다 관료주의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니콜라스 브랫(Nicholas Bratt) 코리아 펀드 사장 =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 정책은 고무적이다. 특히 재벌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구조조정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데 대해 주목하고 있다. 재벌총수들이 기업 자금을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기업의 소유와 경영은 분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액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사외이사제를 확대 도입해야 할 것이다. 외국인 주주들도 기업 경영에 일정한 발언권을 보장 받아야 한다.한국 정부의 재정구조는 부실한 금융기업이나 기업들과는 대조적으로 건실한 편이다. 기업들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결국 한국경제 회생의 두 가지 관건은 부실한 기업과 금융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이를 통해 대외 신인도를 개선하는 것에 달렸다.정부의 개혁 의지가 국회의 입법화 과정에서 제대로 수용될 것인지를 주시할 것이다. 새 법안들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느냐에따라 개혁의 성패가 가름날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에는 단기적인진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이를 반드시 극복하고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닌 진정한 구조 조정을 성취해야 한국은 제2의 도약을 기약할수 있다.◆ 제프리 셰이퍼(Jeffrey Shafer) 샐로먼 스미스 바니 부회장 = 한국은 그동안 정부가 은행장 인사에까지 개입하는 등 적정 수위를넘는 관치금융을 온존시켜 왔다. 이는 은행의 자생적 성장을 저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금융의 건전한 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독소로 작용해 왔다. 한국은 일본식의 정경유착 금융구조에서 하루빨리 탈피해야 한다.한국이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높은 수준의 인적-지적 자산을갖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도를 넘어선 한국인의「자긍심」은 문제다. 이런 지나친 자긍심이 외국인들을 적대시하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로버트 호매츠(Robert Hormats) 골드만 삭스 부회장 = 이번 아시아 경제 위기를 통해 중국은 많은 교훈을 얻었을 것으로 본다.중소기업을 중점 육성하는 대만식 모델보다 한국식의 재벌중심 경제 성장 방식을 모델로 삼아 온 중국이 한국의 IMF 체제와 재벌개편, 해체 등을 어떤 식으로 수용할 지가 관심사다. 이는 향후 세계 경제의 향방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세계 경제의 흐름은 반드시 경제지표, 지수 등의 자로 잰 듯한 정확한 수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주체들의 심리적인 역학 관계가 실물경제를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시키기도한다.중국의 위앤(元)화 절하가 이번 사태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일각의주장은 잘못됐다. 중국의 주요 수출품 경쟁 상대국은 인도네시아와태국이다. 한국의 주요 수출경쟁 상대국은 일본과 대만이다.이번 사태로 인해 장기적인 면에서 혜택을 누릴 나라는 한국과 중국이다. 자칫하면 일본은 패자로 낙오할 지도 모른다. 사실 97년 초까지만 해도 한국 경제는 국제 사회에서 합격점을 받았었다. 돌연외환 위기의 수렁에 빠진 것은 단기외채에 지나치게 의존해 온 탓이다. 그러나 한국은 멕시코나 칠레 등 중남미 국가나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경제의 기본 축이 튼튼하다. 이번 위기를 누구보다도 신속히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김대중 정부의 개혁의지에 감탄하고 있다. 정부의 구조조정 노력이 기업과 은행 부문으로까지 전파될 경우 한국의 재도약은 보장돼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문제는 재계가 새 정부의 고통 분담 촉구나 IMF 체제의 조기 종식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에 얼마나 부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경영 관행을 개혁해야 한다는 얘기다. 정경 유착의 고리를 끊는 진정한 금융 개혁과 자율화만이 한국 경제의 두 과제인 투명성확보와 신인도 회복을 담보할 수 있다.오는 6월로 예정된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 방문때 한국은 그의 개인적 지지도를 바탕으로 미국 입법부, 행정부, 경제계로부터 가시적인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한다. 한국에 시련을 안겨주고 있는 IMF체제는 「위기로 변장하고 나타난 기회」이다. 이를최대한 이용해 그동안 미뤄 온 구조 조정을 서둘러야 한다. 한 단계 더 질 높은 경제 구조로의 도약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