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취임하신지 한달이 넘었지요. KDI원장을 해보시니까 어떻습니까.KDI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규율이 엄격하고 효율이 높은 조직이더군요. 아마 역사가 길어 축적된 역량이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구원들의 자부심도 대단해요. 다른 연구소 박사들 하고는 다르더라구요. 특히 젊은 박사들중에 탁월한 사람들이 많더군요.▶ 당초 KDI원장에 내정됐을 때 말들이 많았지요. 특히 이원장이 경실련에 참여했던 진보적 학자라는 이유 때문에 부적합한 인사라는 지적도 있었습니다만.전혀 그렇지 않다는게 이미 판명되지 않았습니까. 저를 왜 진보적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진보적이라기 보다는 개혁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개혁없이는 살 수 없다」는게 제 지론이었으니까요. 또 제 주변 사람들은 제가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신문 등에 기고한 글을 보면 알겁니다.저를 굳이 분류하자면 극우로 불리는 하이에크 등에 영향을 많이받은 「질서 자유주의자」입니다.▶ 기존 KDI박사들과의 호흡은 어떻습니까.아주 잘 맞습니다. 일단 철학이 같으니까요. KDI박사들은 대부분미국에서 공부를 한 자유경제주의자들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저는 그래서 취임식때 연구진들에게 「그동안 관치경제하에서 고생이 참 많았겠다」고 위로했습니다. 그들의 시각과 달리 그동안 우리 경제는 정부의 지시와 통제에 의해 설계되고 제어됐던게 사실이거든요. 경제 주체들이 모든 정보와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경제를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그러니 대부분이 자유경제주의자인 KDI박사들이 정부 입맛에 맞추느라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겠습니까.▶ 이원장께서 오신 다음에 KDI가 많이 바뀌었겠네요.무엇보다 저는 토론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자마자 준비한「한국경제의 구조조정과 재도약을 위한 종합대책」도 처음부터 토론을 통해 만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KDI에서 군림하기 보다는연구진들을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해 보다 창의적인 연구풍토를 조성하는데 주력할 생각입니다. 여담으로 KDI에 온 후에 박사들은 원장에게 15도 각도로 인사하는데 원장은 박사들에게 60도로 인사한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최근 발표하신 「한국경제 구조조정과 재도약을 위한 종합대책」에담긴 뜻은 무엇입니까.파산의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제시한 프로그램이지요. 과연 그 과정에서 정부기업 금융기관은 무엇을 해야하는지 구체적으로 밝힌 액션플랜이기도 합니다. 물론 정부가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이나 시행키로 확정된 것도 포함됐지만 전체적인 마스터플랜을 보여주자는 차원에서완성했습니다.▶ 지금 우리 경제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매우 심각합니다. 사업자 부채가 1천조원에 달해 기업들이 한해 이자로만 1백50조~2백조원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국민총생산(GNP)이 4백50조원 정도니까 여기서 그만한 이자를 빼면얼마나 남습니까. 금융기관도 현재 부실여신이 47조원이라는데 이대로 가다간 연말께 1백조원에 달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자칫하면 기업과 금융기관이 모두 함께 쓰러지는 공황이 올 수도 있는 위험한 상태예요. 빨리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신속히 구조조정을단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이제 우리에겐 두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2년 정도 고생을 감수하고 재빨리 구조조정을 단행해 선진국 경제시스템으로 전환하든가,아니면 그 고생이 싫어 미적미적 구조조정을 미루다가 아예 3류 국가로 전락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건 국민들이 결정해야 해요. 또 한가지 많은 국민들이 IMF위기를 극복하면 과거의고성장 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줄 알고 있는데 그건 불가능하다는걸 알아야 합니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투입위주의 고도성장 시대는 우리에게 돌아올 수도 없고 돌아와서도 안됩니다.▶ 결국 지금의 경제위기도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말씀이군요.물론입니다. 한국경제의 부도위기는 절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박정희 정권시대의 성장 일변도 패러다임이 총체적인 한계에도달한 것이 이번에 폭발한 거예요. 물론 박정희 시대의 패러다임이 경제성장을 이룬 공(功)도 있지만 어느정도 성장을 이룬 다음에빨리 변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했던게 패착이었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우리가 풀어야할 과제는 무엇입니까.무엇보다 경제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기업이든금융기관이든 살릴 것만 살리고 망해야 할 건 망하도록 해야 하는겁니다. 모두 살리려다가는 모두 망하기 십상입니다. 예컨대 기아자동차나 한보철강 같은 회사는 이미 죽은 기업 아닙니까. 이런 기업들은 빨리 포기하고 살릴 수 있는 것만 선택해 확실히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외국자본이 한국경제를 믿고 들어올 거예요. 지난번일본의 야마이치 증권이 도산하자 일본의 주가가 오히려 올라갔던건 우리가 지금 다시한번 되새겨 볼만한 타산지석입니다.▶ 부실 기업이나 금융기관을 과감히 퇴출시키는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도 적지 않지요.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노조 문제 같은데요.사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외국 언론도 한국기업의 노조 움직임에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오히려 국내 신문에서 별로 신경을쓰지 않는 노조관련 기사도 외국 신문에선 크게 보도되곤 하더군요. 하지만 이 문제도 역시 우리가 인내를 갖고 해결해야할 문제입니다. 아직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렇지만 차츰 나아질 것으로 봅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물론이지요.▶ 과연 우리가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개혁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이런 개혁의 절박성을 잘 알고 있는데다 정부도 착실히 준비하고 있거든요. 언론에선 정부가 지금까지 제대로 한 것이 무엇이냐고 따지지만 나름대로 주의 깊은 전략을 짜고 있는 걸로 압니다.▶ 최근 기획예산위원회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구조조정을 추진하고있습니다. KDI와 관련해선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통합한다는얘기도 들리던데요.우리야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뭐라 말할 입장은 아닙니다. 하지만모든 정부출연연구소를 「1개 부처 1개 연구소」 등의 천편일률적인 기준에 짜맞춰 통폐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이 보다는 제 역할을 하는 연구소와 그렇지 못한 연구소를 구분해정리하는 게 적절하다고 봅니다. 세금 값을 하는 연구소는 더 지원해주고 그 값을 못하면 없애는게 원칙이 돼야 겠지요.▶ KDI가 과거 경제개발 과정에서 정부의 싱크탱크(Think Tank)로서공헌한 점을 무시할순 없지만 한편으론 정부의 시녀 노릇을 했다는혹평도 있습니다.저도 밖에선 KDI를 그렇게 봤습니다. 한데 실제 와서 보니 오해가많았더라구요. 특히 이번에 구조조정 보고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 박사들이 경제부처 장관들과 토론하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장관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저도 그래서 박사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부 예산을 쓰니까 정부로부터 통제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학자로서의소신은 절대 굽히지 마라. 만약 소신을 굽히면 그 사람은 더 이상학자가 아니라 주구일 뿐이다」. KDI가 밖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정부의 경제정책 결정 과정에서 상당히 바람직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걸 간과하지 말아 주십시오.▶ 혹시 벤치마킹을 할만한 외국의 연구기관을 든다면 어떤 걸 들수있을까요.전 개인적으로 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와 같은 역할을 KDI가 했으면합니다. 정부의 정책결정 과정에 공개적으로 참여하는 거예요. 필요하다면 국회에 가서 자문도 하고 말입니다. 국내 유일한 종합경제연구기관인 KDI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대단한 국가적 자산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