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를 들쑤셔 놓은 부실기업정리가 1차로 마무리됐다. 금융감독위원회와 시중은행간사인 상업은행이 지난 18일 정리대상기업 55개를발표함으로써 말도 많고 설도 많았던 부실기업판정작업이 한 획을그었다.발표된 정리대상기업에 대한 평가는 일단 「미흡하다」는 내용이주를 이루고 있다. 당초 5월말에 끝났던 부실판정작업 때보다 숫자가 34개나 늘어난 것은 어느 정도 평가할 만한다. 당시에는 14개기업을 정리하고 7개 기업을 추가로 협의해 정리한다는 정도였었다. 김대중대통령이 처음 판정결과를 보고받고 화를 낼만도 했었다.이번에는 삼성 현대 대우 LG SK 등 5대 그룹 계열사가 20개나 포함됐다. 또 은행의 공동구제금융(협조융자)을 받고 있는 11개 그룹중 8개 그룹 계열사 21개도 정리대상에 올랐다. 대기업 계열사들이많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은행들이 부실기업을 정리하려는 의지를보였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그러나 5대 그룹 정리대상기업에 일반인들에겐 널리 알려져있지 않은 무명기업들이 대거 포함됐다는 점에서 이번 정리작업이 「숫자채우기」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예컨대 정리대상에 들어간 삼성의이천전기나 대도제약은 해당 직원들 아니고는 이번에 처음으로 삼성계열사라는 것을 알았을 정도다. 현대의 선일상선은 직원이 5명인 초미니회사다.그래서인지 산소호흡기를 대고 연명하던 회사에 대해 호흡기를 뗀정도라는 혹평도 쏟아지고 있다. 5대 그룹도 정리대상이 발표되자『예상했던 일』이라며 담담해하고 있다.물론 그룹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일그룹과 해태그룹이 불운의 주인공들이다. 한일그룹은 한일합섬등 주력 4개사 퇴출판정을 받았다. 그룹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됐다.그룹측에서는 한일합섬을 국제상사와 합쳐 살아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한일그룹은 지난 56년 경남모직으로 출발, 한때 한국최대의 화섬업체라는 영화를 누렸다. 수출역군이라는 칭호도 받았다.창립 40여년만에 사라지는 비운을 맞게 됐다.해태그룹도 작년말 그룹전체가 부도났지만 재기의 꿈을 키워왔었다. 그러나 유통 전자 제과등이 모두 퇴출대상으로 찍혀 「해태」브랜드는 53년만에 소비자들의 눈에서 사라지게 됐다.퇴출대상기업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미흡하다고 하지만 이처럼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된 그룹도 2~3개 나왔다. 금감위는 이번 정리대상선정기준을 「독자적으로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을 중점적으로 따졌다고 밝혔다.퇴출기업들은 다양한 말로를 걷게 된다. 가장 흔한 방식이 계열사에 합병되는 것이다. 현대가 현대리바트를 거래및 지분관계가 많은계열사에 합치는등 합병을 통해 정리하겠다는 기업이 적지 않다.지분매각이나 자산매각도 한 방식이다. 아예 기업간판을 내려 정리하는 청산대상도 있다. 합병을 하든 청산을 하든 은행빚을 갚는게가장 큰 일이다. 금감위는 정리대상기업을 다른 기업에 합치더라도정리대상기업이 안고 있던 채무는 갚아야 한다고 밝혔다.◆ 4만여명 실직자 발생정리기업처리과정에서 가장 큰 파장은 역시 종업원들의 실직이다.55개 퇴출기업전체 종업원은 2만9천12명이다. 문제는 이들 기업에의존하고 있는 협력업체종업원들도 동시에 실직위기를 맞는다는 점이다. 이들까지 합하면 대략 4만명이 정리태풍권에 들어간다. 합병등으로 일부 고용승계가 이뤄진다면 1만명 정도가 일자리를 잃을것으로 노동계는 추측하고 있다. 휴지조각이 될 정리대상기업주식을 갖고 있는 투자자나 담보를 챙기지 못한 종금사, 새로 부실여신을 떠안은 은행들의 피해도 적지 않다.부실기업정리가 1차로 마무리됐으나 관심은 앞으로의 기업구조조정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쏠려 있다. 금감위도 이번 정리대상발표는 「기업구조조정의 시작일 뿐」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몰아칠 구조조정태풍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한 것이다.이와관련, 재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른바 3각 빅딜(사업맞교환)의 실현여부다. 정치권과 대통령의 입을 통해 구체화된 빅딜은돈줄을 쥔 은행을 통해 급류를 탈 가능성이 높다. 금감위가 빅딜을하지 않는 기업에 은행 돈을 더이상 꾸어주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기 때문이다. 맞교환을 이뤄내지 못하면 정리하겠다는 의지를 선언한 것이다.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빅딜에 대한 의지를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산업은 과잉투자다. 아니 과오(잘못된)투자다. 그것을 그냥 끌고가면 국가경제 전체로 효율성이 떨어진다. 외국돈을끌어들여 살아보겠다고 노력한다지만 그럴 경우 역시 과잉문제가제기된다. 다른 기업과 맞바꾼 후 과잉시설을 털어내거나 외국에팔아 경쟁력을 갖추는게 국가경제차원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빅딜과 함께 구조조정의 태풍을 몰고올 진원지는 공정거래위원회다. 공정위는 앞으로 30대 계열의 부당한 내부거래를 철저히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계열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연장하는 기업을 골라내 정리한다는 취지다. 이번 정리작업에서는 이같은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심도있는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다. 은행들은 재무제표와사업성을 주로 따져 판정했다. 공정위가 부당내부거래철퇴라는 칼을 들이대면 추가로 정리될 기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번에 살아났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실제로 금감위는 추가퇴출을 위한 몇가지 구상을 발표했다. 첫째가5대 계열에 대해서는 7월말까지 은행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다시맺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회생이 힘들다고 판정된 기업은 자연스럽게 퇴출대상에 오른다.또 6대부터 64대 계열에 대해서도 족쇄를 걸었다. 조흥 상업은행등을포함한 8개 대형은행이 은행별로 2개 계열기업군을 선택,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하도록 했다. 구조조정작업은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위한 것이다. 좋은 말로 경쟁력을 높일수 있는 사업재편이나 합병등을 말한다. 그러나 작업과정에서 퇴출압력을 받는 곳도 나올 수밖에 없다. 금감위는 추가적인 계열해체도 있을수 있다고 밝혔다.이들 64대 계열이 아닌 대기업이나 중소기업들도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8개 대형은행은 이중 대기업을 10개씩 골라 구조조정을 해야한다. 생존이 불투명한 기업은 흔적없이 사라질 수 있다.기업구조조정과정에서 살아난 기업에는 적잖은 지원책이 뒤따를 전망이다. 은행들은 단기부채를 장기로 바꿔주거나 빚자체를 주식으로 바꾸는 출자전환도 추진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채를 탕감해줄수 있다. 살아남은 자는 더욱 강하게 미용시켜준다는 얘기다. 이런 작업을 할 은행별 기업구조조정팀(워크아웃팀)이 지난 20일전후 대부분 발족됐다. 금융기관공동의 기업구조조정위원회(가칭)도 곧 생긴다. 이 위원회는 기업을 살리기 위한 방법론이 금융기관마다 다를 경우 이를 조정하고 정리여부에 대한 이견도 완화하는역할을 한다.부실기업의 퇴출은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하기 전에 경제전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우리 스스로 적극 추진해야 한다. 회생불투명한 기업에 무한정 돈이 들어감으로써 우량한 기업들이 자금을못구해 부도나는 것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부실기업의 퇴출은 투명하고 객관적인 기준만 적용되면 경제전체의 활력을위해 필요하다고 할수 있다. 다만 구조조정작업이 부실기업선정에지나치게 경사돼 있는게 문제다.살아날 수 있는 기업을 적극 발굴해 지원하고 우량기업을 더 우량하게 만들어주는 정부차원의 노력이 부실기업정리보다 더 절실하다고 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