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주전자는 참 다양해졌다. 물이 끓을 때 도미솔 화음이 울려퍼지는 하모니카주전자를 비롯해 나비처럼 생긴 나비주전자, 천사날개가 달린 천사주전자 등.남양키친플라워는 이들 제품을 포함해 모두 50종이 넘는 주전자를생산, 주전자만으로 연간 1천만달러를 벌어 들인다.전기밥솥 냄비 압력솥 등도 수출하는데 주전자를 합칠 경우 연간수출규모가 2천만달러에 이른다. 지난해 매출액 2백60억원중 해외에서 번게 60%가 넘는다.미국 최대 주방용품회사인 코닝이 남양키친플라워의 제품을 수입판매하는 것을 비롯, 캐나다 유럽 동남아 남미의 30여개국 바이어들이 이 회사 제품을 취급한다. 남양스텐레스이던 사명을 올 7월초남양키친플라워로 바꾼 것은 브랜드와 상호를 통일, 국내외 소비자에게 더 잘 알리기 위한 것.◆ ‘키친플라워’ 브랜드 구축국내 주방용품업체들 가운데 경영난을 겪는 업체가 많지만 해외주문이 몰리는 남양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비결은 거북이전략. 창업주인 서달용사장(59)은 사업을 하면서 절대 무리하지 않고 번만큼만 투자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토끼처럼 한걸음에 멀리 뛰려하지 않았다. 호황기에는 남들처럼 은행빚을 끌어들여 대대적으로사업을 확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이런 전략을 창업후 33년동안 이어왔다. 낮은 부채비율도 이에서 기인한 것은 물론이다. 거북이전략은 국제통화기금(IMF)사태이후 진가를발휘하고 있다.그동안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일본 트윈버드사와 제휴, 전기밥솥전기레인지 콤비쿠커등을 개발했다. 이들 신제품은 가을부터 시판에 들어갈 예정이다. 또 뒤퐁사의 실버스톤 마케팅기법을 도입, 알루미늄 프라이팬 판매확대 계획 등 다양한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서사장이 남양을 창립한 것은 지난 65년. 양은그릇장사를 한 부친의 영향을 받았다. 광주일고와 건국대 상과를 나온 서사장은 학교졸업후 서울역앞 동자동에서 부친의 사업을 돕고 있었다. 지방에서올라온 그릇행상들을 상대로 외상판매를 하고 월말에 수금을 했다.그는 양은그릇이 가벼운 장점은 있으나 산이나 알칼리에 약하다는점을 알고 있었다. 신김치를 담아두면 오래지 않아 푸석푸석해지는등 부식되는 것도 목격했다. 당시는 놋그릇과 양은그릇이 그릇의세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놋그릇은 무겁다는 단점이 있었다. 뭔가다른 소재가 없을까 고심하던 차에 때마침 출현하기 시작한 스테인리스는 그를 단번에 매료시켰다. 거울처럼 매끈한 표면에 녹이 슬지 않았고 강도는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가게 인근에 20평의 장소를 얻어 7명의 직원과 함께 남양스텐레스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밥그릇과 세수대야 쟁반을 만들었다. 69년엔 마포구 당인동에 2백평 규모의 공장을 마련, 주전자 전문업체로전환했다. 주전자는 밥그릇에 비해 훨씬 복잡한 공정을 필요로 하는 제품이다. 단순한 제품보다 기술력있는 제품을 생산해야 앞서갈수 있다고 판단했다. 70년대 중반 동남아 중동등지로 수출붐이 일면서 주전자는 만들면 팔렸다. 남양은 수출에서 번돈을 밑천으로김포와 주안에 공장을 마련하는 등 성장했다. 키친플라워라는 브랜드도 만들었다. 주방의 꽃으로 인정받겠다는 포부가 자리잡고 있었다.하지만 사업엔 기복이 있기 마련. 88년 봄은 혹독한 시련기였다.6.29선언으로 불어닥친 노사분규가 전국을 휩쓸며 이듬해 인천을강타했다. 남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로자들 농성이 시작됐고 공장은 섰다. 바이어들은 제품을 빨리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지만 단한건도 수출할 수가 없었다. 이때의 애타는 심정은 뭐라 표현할 수없었다.20여년동안 자식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쳐온 공장문을 닫기로 결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를 경영한다는게 아무의미가 없었다. 폐업과 공장매각방침을 밝히자 근로자들이 온건파와 강경파로 갈렸다. 내분이 일면서 결국 파업을 주도한 강경파가회사를 떠나게 됐고 가까스로 위기를 극복했다.때마침 고임금에 시달리던 미국의 코닝은 주방용품 생산라인을 해외로 이전키로 하고 여러곳의 공장을 물색하던중 주전자라인을 남양에 넘기기로 했다. 기술수준과 종업원의 숙련도 등을 검토한 결과 남양이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 각종 금형과 설비를 이전하고 남양으로부터 제품을 조달키로 했다. 이로써 남양은 안정적으로제품을 수출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게 됐다.서사장은 사업을 하면서 생산제품을 하나씩 늘려갔지만 원칙은 분명히 지켰다. 중소기업은 한우물을 파야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에따라 주방용품분야로만 넓혀갔다. 냄비 압력솥 전기밥솥 튀김팬 식기건조대 알루미늄 경질냄비등.또 제품의 기능 못지않게 디자인을 중시했다. 디자인팀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외부 디자인전문업체에 의뢰, 1년에 수십개의 새모델을선보였다. 주전자 뿐 아니라 전기밥솥 쿠커등의 디자인과 컬러가다양한 것은 서사장의 디자인중시 경영에 따른 것이었다. 레드 블랙 화이트 블루 등 실내 인테리어에 어울릴수 있게 여러가지 색상을 선보였다.생산제품에 대해선 KS Q UL 등 국내외 각종 품질인증마크도 획득했다.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브랜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품질과 가격을 보고 구매를 결정하지만 갈수록 이들보다는 상표를 보고 사는경향이 더욱 커진다고 판단한 것. 따라서 키친플라워라는 브랜드이미지 구축에 활발히 나섰다.◆ 공정별 소사장제로 전환서사장은 IMF가 자사엔 호기로 작용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국내소비자들의 거품구매가 사라지고 있어서이다. 그동안 국내 고급주방용품시장은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의 고가제품이 주도해왔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외국제품 소비가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값싸고품질좋은 국산제품을 찾기 시작했다.게다가 원화가치하락으로 수출경쟁력은 더욱 높아졌다. 서사장은이미 종업원 2백명가운데 3분의 2를 소사장제로 전환, 몸도 가볍게해놓은 상태다. 성형 프레스 용접 연마 전해세척 블레이징등 각종공정을 소사장제로 바꿨다.『회사를 경영하면서 느낀 점은 자신의 능력을 토대로 한발짝씩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리한 확장이나 단번에 돈을 벌려는 생각은 금물입니다.』외형성장을 못하면 기업인으로서의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는 기업평가풍토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양적팽창주의가결국 외환위기를 불렀다고 단언하는 서사장은 21세기에도 역시 자사의 경영은 거북이전략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02)719-7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