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 부채 처리가 걸림돌 ... 부품업계 도산속출 등 불안감 확산

기대를 모았던 기아자동차 처리가 또 지연됐다. 새정부 들어 경제현안 「0순위」로 지목돼온 기아문제는 국제입찰이라는 히든카드까지 동원했으나 결과는 유찰로 끝났다. 류종열 관리인과 채권단은지난 4일 입찰 안내문을 발송하는 등 곧바로 재입찰에 들어갔지만이번에도 낙찰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부채 탕감 쉽지 않다기아 및 아시아자동차의 1차 입찰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천문학적 규모의 부채 때문이다. 이 두 회사의 부채는 12조8천억원. 미화로 환산하면 1백억달러에 육박한다. 그러나 채권단은 원금탕감(Write-of)없이 이자율과 상환기간만 조정(Rescheduling)했다.응찰업체들이 얼마나 큰 부담을 느꼈는지는 응찰내역에서 분명히나타난다. 현대자동차는 유찰을 1백% 확신하고 기아 1백원, 아시아자동차 10원이라는 기상천외한 응찰가를 써냈다. 포드는 기아의 적정 부채가 4조원이라며 8조8천억원의 막대한 원금 탕감 조건을 내세웠다.그렇다면 얼마나 더 부채를 덜어줘야 하나. 채권단은 이제 큰 고민에 빠졌다. 단순한 리스케줄링 정도가 아니라 상당폭의 원금 탕감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응찰업체들의 요구를 무작정 따라갈 수도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아 채권단은 모두1백28개 금융기관으로 구성돼 있다. 사실상 국내 금융기관들이 총망라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부채 조정은 34개 주요채권 금융기관이 참석하는 채권단 회의에서 3분의2 찬성(담보채권은 5분의4)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대규모 부채 탕감시 1백28개 금융기관중 일부는 존폐의 기로에 설수도 있는 상황이다. 국제결재은행(BIS)의 자기자본비율 8%를 충족시키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권단의 추가 부채 조정도 많아야 1조원을 넘지못할 것이란 얘기도 들려온다.『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응찰업체들이 만족해하면서동시에 수많은 채권금융기관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이 그렇게 쉽게도출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부채를 덜면 덜수록 국민 부담이 그만큼 커진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산업은행 관계자)산업은행 등 채권단은 △원금 탕감 △이자율 추가 감소 및 상환기간 추가 연장 △원금탕감+추가 리스케줄링 등 몇가지 안을 놓고채권단 회의를 열어 오는 10일까지 부채상환 규모 및 조건에 대한재조정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재유찰후 빅딜?재입찰 방침이 알려진 직후부터 자동차 업계에서는 2차 입찰도 유찰될 것이란 분석이 강력히 제기됐다. 물론 채권단의 부채 탕감에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가정에서다. 동시에 기아 처리는 궁극적으로 「빅딜」로 해결될 것이란 소문이 급속히 나돌았다. 전경련구조조정 태스크포스도 지난 3일 5대 그룹의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면서 『기아의 국제입찰이 유찰될 경우 현대 대우 삼성이 자동차구조조정을 논의한다』고 명시, 유찰시 기아처리를 빅딜과 연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빅딜」설의 골자는 현대와 대우가 기아·아시아자동차는 물론 삼성자동차까지 공동 인수한다는 것이다. 논리적 근거는 국내 자동차산업의 최대 문제점은 설비 과잉의 해결이다. 현대-대우의 2사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 자동차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차선책이지 않겠느냐는 판단에서다.국내 완성차 업계의 생산능력은 연간 4백20여만대에 이르고 있다.그러나 지난해말 기준으로 실제 생산량은 2백80여만대로 가동률은68%에 불과하다. 특히 IMF사태 이후 급격한 내수감수로 올해 자동차 내수 및 수출 판매대수는 2백만대를 조금 넘을 것이란 전망이다. 올들어 업계의 평균 가동률은 50%에도 못미치고 있는 실정이다.현대와 대우는 이를 바탕으로 2사 체제론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현대자동차는 「한국 자동차산업의 바람직한 구조조정 방향」이란자료에서 『갈수록 대형화하는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2개 정도의 업체를 중심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김우중 회장도 『기아 입찰이 실패할 경우 결국 현대와 대우가 이를 책임질 수밖에 없다』며 『설비 과잉이 최대 문제인만큼 일부설비는 해외 이전이나 매각도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여러차례 전개했다.정치권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회의의 한 인사는 얼마전 외국자동차업체 관계자를 만난자리에서 『기아 인수는 국내 모업체가 유력한 것 같다고 했더니전혀 이해 못하는 표정을 짓더라』며 『연간 3백만대 이상의 생산능력을 갖춘 선진메이커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도 그같은업체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동감이 갔다』고 말했다.빅딜 논의와 관련해서는 1차 입찰에서 강력한 기아 인수의지를 보인 삼성의 태도변화도 큰 변수다. 삼성은 이번 입찰과정에서 그룹재무팀과 기아 인수를 위한 전략팀간에 상당한 반목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입찰 사무국으로부터 부채 탕감 조건 철회여부를 통보받고도 철회하지 않은 것은 결국 기아인수를 탐탁지 않게여기는 재무팀의 주장이 먹혀들어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있다. 또 최근 전경련 태스크포스 회의에서도 『기아를 싼값에 인수하면 좋지만 그렇게 안될 경우 모든 것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또 삼성전자 등 대부분의 주력 계열사가 그같은 비싼 비용을 치르고 기아를 인수하는 것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향후 삼성의 거취가 주목된다.물론 빅딜이 아니라 2차 입찰에서 낙찰자가 선정돼 기아문제가 처리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채권단이 응찰업체들의 기대만큼 부채원금을 탕감해 줄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설비 과잉 문제는 여전히 남게 돼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자동차 산업의 재편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어쨌든 빨리 처리돼야 한다낙찰이든 빅딜이든 기아 문제가 빨리 처리돼야 한다는데는 이론의여지가 없다. 자동차 부품업체들의 모임인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의 잠정 집계 결과, 지난해 7월 기아 부도유예이후 지금까지 현대대우 기아자동차의 1천3백39개 1차 협력업체 가운데 14%인 1백49개사가 부도를 냈다. 기아사태의 최대 악영향으로 우려되던 부품업체들의 연쇄 도산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다간 국내 자동차 산업의 토대가 완전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낳고 있다. 게다가 이번 유찰로 협력업체들이 버틸 힘을 더욱 상실한데다 만도기계 사태까지 겹치는 등 벼랑끝 상황이 심화되고 있는실정이다. 따라서 낙찰이든 빅딜이든 기아 처리가 하루빨리 마무리지어져야 한다는게 자동차업계 종사자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