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창녀제도 부인....결혼으로 다양한 관계 허용

아랍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소 특이한 경험들이 거론되고 있다. 물건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한국에는 비록 몸을 파는 여인이라고하더라도 능히 상대할 여자가 없다는 주장을 필자는 언젠가 들은적이 있다. 중동 바이어가 한국에와 기생접대를 하는데 밤시중을들 여자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는 증언을 술집마담으로부터 직접 들었다.이들은 물건을 단련하기 위해 사막의 모래를 이용한다는 등의 속설도 많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을 섬기는 중동인들에 대한 신비감이나 적대감들은 대개 기독교도들이 만들어 낸 것들이며 분명 역사적뿌리가 있다. 기독교도들이 그들의 진정한 본가라고 생각하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에 강탈당했을 때 그들이 갖는 공포감과 실망감등은 복잡하고도 왜곡된 속설들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콘스탄티노플은 동서방의 경계이기도 했지만 이 도시를 통해 정교(오소독스:orthodox)가 중앙유럽의 이동지역으로 퍼져나갔다.정교가 확산되었던 지역들은 모두 나중에 공산주의 진영으로 편입되었으니 어떤 사소한 것이든 역사에 뿌리와 근거가 없는 것은 없다. 독일의 엘베강을 중심으로 이동지역은 모두 소피아 성당들로채워져 있던 정교 지역이다. 로마 가톨릭의 종가집이요 예수의 제자들이 직접 포교했던 지역이다. 무슨일에서건 그렇지만 종가라는곳은 전통지향적이며 폐쇄적이고 융통성이 적다. 그러다 보니 발전도 늦고 사상의 곳간은 언제나 펀드멘탈리즘으로 채우게 마련이다.종교가 모순된 교리를 갖고 있지 않다면 종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심성을 더듬는 복잡한 과정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해서 언제나 모호한 음성으로 접근해온다. 이슬람이 창녀를 어떻게 취급했는지는 언제나 관심거리이다. 이슬람 역시 창녀들 특히고급 창녀들을 두고 있다. 유럽사회는 근대사회가 도래할 때까지도그리스 헤타리아의 전통들을 굳게 지켜왔다. 이들 고급 창녀들은어쩌면 예술적 취향을 갖고 있는 교양계급의 한변두리로서 역할을잘도 해냈다. 그래서 이들 여인들은 언제나 권력의 주변에 기생하며 권력의 한 액세서리로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 마타하리라는간첩이 가능한 것도 유럽사회의 이런 전통 때문이다.이슬람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창녀제도가 부인되었다. 『아내를 여럿두는 것이야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감히 돈으로 인신을 매매하는 창녀라니…』그래서 고안된 것이 계약결혼이었다. 하루밤이라도 결혼한 부인이라면 얼마든지 관계가 허용되었다. 다음날 이혼하면 되니까. 이런풍습 내지 관습은 「무타」라는 이름으로 무하마드 이전부터 용인되었다. 무하마드는 그런 관계가 상호 합의한 것이라면 죄가 되지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