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처 생계수단으로 익힌기술이 천직돼...가격 절반 인하 재도약 나서

서울시 종로6가에 있는 골덴양복점을 들어서면 「추억 속의 앨범」을 뒤적이는 듯한분위기에 빠진다. 4평이 될까말까한 이 양복점에 들어서면맨먼저 「정성들여 만든 양복, 웃고 오는 우리 고객」이라는 점훈(店訓) 이 눈에 들어온다. 다소 신파조같은 이점훈은 노랗게 빛이 바래 세월의 무게를 실감케 한다.고개를 돌리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인사가 젊은 재단사로부터 옷을 가봉받고 있는사진 몇장이 양복지 사이 사이에 걸려 있다. 작고한 코미디언 서영춘씨와 김희갑씨,영화배우 유장현씨, 가수 김상진씨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타임머신을 타고 30여년을 거꾸로 간듯한 분위기가 풍기는이 양복점 대표는 박철민씨(53). 박사장은 기성복의 공세에 밀려 양복점이 사양길에접어들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양복점을 운영해오고 있다. 이 업종에 뛰어든지도 올해로 28년째이다. 변변치 못한 수입으로 아이들 교육시키고 집도 장만했으면 됐지『더 이상 바랄게 무엇있겠느냐』는 생각에서다. 양복점은그에 있어서 천직인 셈이다.골덴양복점에 걸려 있는 빛바랜 사진은 박사장과 양복점과의 인연이 어떻게 맺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춘기시절그의 꿈은 양복점사장이 아니었다.「맨발의 청춘」에서 열연,뭇사람의 심금을 울렸던신성일같은 영화배우가 되는것이 꿈이었다.이런 꿈을 안고 고향 경남 밀양에서 서울행 기차를 탄 것은 63년. 이웃동네에 사는 친구가 가수가 된 것도 서울행을 부채질한 요인이었다.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악극단에 들어갔다. 악극단을 따라다니다 보면 배우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악극단 단원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비오는 날에는 공연이 「공」을 치고 끼니를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3개월 동안 악전고투하고있던중 제일영화사에서 영화배우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기회가 왔다싶어 응시를 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쓰라린 좌절감을 맛보았다. 외모 및 연기테스트는 뒷전이었고 논문작성등 이론중심으로 1차테스트를 했다.고졸학력이 전부였던 그는 충격을 받고 서라벌예대에 진학, 본격적인 연기자수업에나섰다. 비록 엑스트라일망정영화와 관련된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뛰며 학비를 벌었다. 주경야독의 고달픈 생활이었지만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산으로 받은 과수원 팔아양복점 개업차츰 충무로 영화가에서 그를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영화배우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데뷔작은 심우섭감독의「청춘사업」. 코미디물인 이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다.그토록 원하던 영화배우가 됐지만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조연으로 출연해 받는 돈이래야 쥐꼬리만해 하루 세끼 해결하기도 벅찼다. 연기생활을계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계수단이 필요했고 궁리끝에 그는 당시 장사가 잘되던 양복점을 차리기로 결심했다.『고향으로 내려가 아버님과담판을 벌였습니다. 어차피돌아가신 다음에 유산을 물려줄거면 지금 물려달라고 했지요.』과수원을 팔아 양복점을 차렸지만 이 재산을 영화제작에뛰어들었다가 흥행에 실패,몽땅 날려버렸다. 마땅한 생계수단을 찾지 못하던 그는양복점운영을 하면서 곁눈질한 양복재단기술을 배우기로결심했다.이때가 67년. 서울시 종로2가「수도라사」재단보조로 들어가 양복재단기술 습득에 나선그는 2년여의 노력 끝에 정식재단사가 됐다. 서울재단연구회에서 주최한 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주연 한번 못해봤지만 양복재단기술에 관한한「스타」가 된 셈이다.계림극장부근 합성라사에서재단사생활을 시작한 그는 명동, 을지로2가 유명 양복점에서 70년대초까지 재단사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도 영화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않았다. 조연, 단역 가리지 않고제의만 들어오면 출연,연기수업을 쌓아나갔다.재단사생활을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은 그는 75년 골덴양복점이라는 상호를 내걸고다시 양복점을 개업했다. 양복점 운영은 승승장구했다.당시는 기성복이 지금처럼 유행하지 않아 맞춤양복 수요는많았다. 골덴양복점이 승승장구하게 된 것은 충무로에서인연을 맺은 선후배 배우들의간접지원도 한몫했다.『양복점을 열었다고 하니까평소 알고 지내던 배우들이찾아와 양복을 한두벌씩 맞춰입더군요. 이것이 소문이 나면서 다른 사람들도 몰려 들어 수입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잠시 접어두었던 영화출연도 재개했다. 심우섭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아니 벌써」에 1인2역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10여편의 영화에 잇따라 출연했다. 물론 주연은 다른 사람몫이고 조연에 지나지 않았지만 행복했다. 하고싶은 일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다.80년대들어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부근에 잉글랜드란상호로 지점까지 내며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또 한차례 위기가 닥쳤다. 큰돈 한번 만져볼 생각을 갖고 강남구청옆에있는 영동회관을 8천만원에인수, 음식점업에 뛰어들었다.그러나 주방장이 말썽을 부려1년도 못돼 헐값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만 했다.이와중에 대기업들이 기성복시장에 잇따라 진출하면서 양복점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그래도 박사장은 골덴양복점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준 원천이 바로 양복점이었기 때문이었다.남들은 다 포기해도 장인정신이 깃든 양복을 만들어내자는오기도 발동했다. 한때 잘 나갈 때는 동마다 10여개에 달했던 양복점이 이제 많아야1~2개에 불과할 정도로 쇠퇴했지만 그는 끝까지 맞춤양복점을 지킬 생각이다.이런 각오로 올해 그는 파격적인 판촉전을 펼치며 맞춤양복 사수에 나서고 있다. 제일모직등 6대회사 고급지로 지은 추동복 및 동복정장 한벌을 지난해 절반가격인 18만원에 맞춰주는 한편 3년간 애프터서비스제도를 업계 처음으로 도입, IMF한파 정면 돌파에 나서고 있다.『기성복에 밀려 양복재단을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 제일 안타깝습니다. 』 7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비록 주연 한번 해보지 못했지만 최후까지 살아남는 양복재단사가 되겠다는 그의 말에서 주연 이상의 무게가 느껴진다. (02) 741-3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