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재계간 힘겨루기가 점입가경이다. 연말까지 가시적인 기업구조조정을 이루려는 정부는 재계, 특히 5대그룹에 대한 압박의 고삐를 늦추지않고 있다.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제재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계좌추적까지 들먹이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에 반해 재계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들며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구조조정을 호소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노골적인 불만을 감추지 않으며 강도높은 맞대응에 나서고 있다. 쌍방간의 속내를 잘아는 상태에서 치러지는 이번 「게임」의 승패가 어떻게 가려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정부의 공세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17일 「5대 기업집단의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해 상시적인 부당내부거래 조사 체제를 갖추겠다」고 발표했다. 나아가 지난 4월 이후 재벌들이 탈법적으로 채무보증을 섰는지도 조사한다고 밝혔다. 두차례에 걸친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끝내자마자 숨돌릴 틈조차 주지않고 재벌들을 세차게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공정위가 휘두르는 채찍은 이번 역시 부당내부거래조사 강화와상호채무보증 조기해소이다. 그동안 공정위가 휘둘러온 전가의보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강도를 더욱 높였다.5대 재벌 전 계열사에 대해 상시적인 조사체계를 갖추고 부당내부거래혐의를 인지하는 경우 즉시 조사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나출자(유상증자)를 통해 부실계열사를 지원하는 것을 차단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재벌들이 법으로 금지된 신규채무보증을편법적으로 하고 있는지도 조사하겠다고 강조했다.공정위는 이같은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로 5대재벌의 구조조정이6대이하 그룹보다 지지부진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공정위는 그 근거로 5대재벌의 회사채 발행 내역과 출자총액 자료를 제시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 10월말까지 5대재벌이 발행한 회사채는 모두 32조6천7백70억원. 전체 발행금액42조5천1백40억원의 76.9%에 달한다. 또 30대그룹 계열사간 출자총액제한이 풀린 지난 2월말 이후 5대재벌의 출자총액은3조4천4백30억원이 오히려 증가했다. 6대그룹이하에서 4백40억원이 준 것과는 대조적이다.게다가 지난 4월 30대 그룹이 신규로 지정된 이후 지난 11월2일까지 6대그룹이하는 계열사가 42개 줄었지만 5대 재벌은 되레4개가 늘었다. 이같은 수치를 볼 때 5대 재벌은 구조조정의 무풍지대라고 할만하다는 것이다.공정위는 이중 5대 재벌의 출자총액이 늘어난 것은 구조조정이미흡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징표라고 판단하고 있다. 당초 공정위가 올 2월 출자총액제한을 푼 것은 외국인 M&A허용에 발맞춰역차별 조항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구조조정 촉진 위해 조사나서그러나 현실에서는 재벌들이 부실계열사를 지탱시키는 수단으로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부실한 계열사의 유상증자에 참여할 경우 그룹전체의 부실마저 심화될 것으로 공정위는 우려하고있다.전 위원장이 『출자에 의한 부당지원행위를 근절하겠다』며 『구체적인 유형을 부당지원행위 심사지침에 반영할 계획』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공정위의 강경책은 전체적인 맥락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부 차원의 「5대재벌 목죄기」전략의 하나라는 얘기다. 얼마전금융감독위원회가 IMF(국제통화기금)와 함께 재벌의 자금줄을조이는 새로운 여신관리제도를 발표한 것도 마찬가지다. 연내에기업구조조정을 완전히 끝내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착착 시행되고있는 과정이다. 최근에 김대중 대통령이 경제부처 장관들에게 구조조정 업무를 철저히 챙길 것을 지시한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있다.정부가 추진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하나씩 하나씩 연결해가면 그끝은 「재벌 해체」에 맞닿아 있는 듯하다. 물론 정부 당국자들은 이에 대해 펄쩍 뛴다. 해체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력업종 또는 핵심역량 강화라는 기업구조조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못한 것이라고 반박한다.하지만 굳이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따지지 않더라도 이같은 구조조정의 결과로 문어발식 경영이나 재벌 총수로의 권한집중 같은특징이 사라진다면 그것이 바로 재벌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재계의 대응재계는 앞으로 경영환경이 더욱 나빠지게 됐다며 곤혹스러워하고있다. 기업들은 민간기업의 경영행태를 강제적으로 조정해보겠다는 정부의 정책은 부작용만 낳을 것이라며 불만에 찬 표정이다.특히 공정위로부터 사사건건 트집을 잡히고 있는 현대 삼성 대우LG SK 등 5대그룹은 부당내부거래 과징금 부과에 행정소송으로정면 대응하는 등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다.사실 최근 정부가 대기업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재계의 이런 반응에는 일면 수긍이 간다. 최근 집권여당은 공정위에 한시적 계좌추적권을 허용키로 했다. 또 공정위는 1, 2차 부당내부거래 조사에 이어 대기업그룹의 탈법적인 채무보증에 대한 조사 방침을밝히는 등 압박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여기에 청와대까지 나서재벌구조조정 현황을 직접 챙기기 시작해 재계는 유례없이 강한중압감을 느끼고 있다. 모 그룹 관계자는 『정책이 경쟁적으로쏟아져 경제부처 담당자들도 헛갈릴 정도』라며 『도대체 누구를위해 정책을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손 봐주는' 경제정책 부작용만전경련 관계자도 『잘 하는 기업에 상을 주는 일은 없이 무조건못하는 업체만 징벌하겠다는 정책 하에서 누가 기업을 하려고 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재계가 이처럼 반발하는 것은 경제부처가 앞다퉈 구조조정 압박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 「대기업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해서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A사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재경부나 금감위는 5대그룹이 자금사정이 좋기 때문에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같다』며 『이를 회사채발행 제한 등 인위적으로 바꾸려할 할 경우 자금시장 왜곡 현상은 오히려 심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정위의 경우도 똑 같은 눈으로 5대그룹을 주시하고 있다』며 『해당 기업의 영업을 마비시키는 부당내부거래조사를 수시체제로 바꾼다는 것은 지나친 조치』라고 지적했다.5대그룹이 크게 잘못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멀쩡하기」 때문에 손을 봐주겠다는 식으로 경제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다는게 재계의 피해의식인 셈이다. 실제적으로 기업이 입는 피해가 적지않다는 점도 재계가 반발하는 이유다.예를 들어 공정위가 내년 2월15일까지 기업들로부터 올해말까지의 채무보증 해소실적과 앞으로의 해소계획을 받아 실적을 점검키로 한 내용에 대해 기업들은 사실상 시한을 앞당긴 것이라는지적을 하고 있다. 중간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상호지보의 조기 해소를 독촉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기업의 자금조달 계획엔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물론 5대그룹들도 『한국을 대표하는 5대그룹의 구조조정이 미진해 한국의 대외신인도가 높아지지 않고 있다』는 정부의 기본 시각이 잘못됐다고는 보지 않는다. 또 자신들이 눈에 띄는 구조조정을 할 경우 경제상황이 급속히 개선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있다.그러나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이는 방법에 있어서는 정부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은 기업간 경쟁과 기업의자구노력을 통해 촉진될 수 있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모 업체사장은 『정부가 1년 가까이 기업들을 압박해서 얻은 것은 기업매물 가격의 하락 뿐』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각 경제부처가 경쟁적으로 대기업 정책을 내놓으면서 기업을 압박하자 투자를 검토하던 외국인들이 발을 뺐다는 설명이다.전경련 관계자는 『정부 주도의 기업구조조정은 부작용만 낳고효과가 떨어진다』며 『대기업이라는 이유로 잘 되고 있는 기업들에 불이익을 주는 조치는 정책 효과를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