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언제나 성적인 함의를 갖는 것이었다. 오늘날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 발전되어 있는 발레도 마찬가지였다. 르네상스의 붐을 타고 무대에 오른 발레는 처음에는 식사후 여흥을 즐기거나단순한 교예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오늘날관람하게 되는 절묘한 기교들도 거의 없었다. 절제된 동작 화려한 발끝의 기교들은 대부분이 19세기말과 20세기 초 러시아에서형성된 것이다.그러니 발레는 처음에는 거의 퇴폐적 여흥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탈리아에서 부활한 발레가 발전의 전기를맞은 것은 역시 프랑스에서였는데 이때가 프랑스와 1세 치하의16세기였다.당시 기록들은 이들 발레는 언제나 2, 3명이 무대에 등장해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일종의 민속적 요소를 갖는 것임을 보여주고있다. 17세기 루이 14세에 이르러 발레는 발전의 전기를 맞았고18세기에는 스토리를 갖는 드라마적 요소를 갖게 되었던 것으로알려져 있다.그러나 발레는 언제까지나 왕후 귀족들의 취미생활이나 성적 생활을 장식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다른 어떤 궁정 행사보다 발레는 더욱 직접적으로 관능미를 자극했다. 결국 오랜 기간동안 발레리나들은 왕후장상들의 애첩같은 존재로 격하되어 있었고 때로는 매춘과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이에 관해서는 호색한 카사노바의 회상록에도 잘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독일 궁정의 무희들이 대단히 아름다웠으며 모두가 황제를 모신 일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고 썼다. 이런 일은 실제로 다반사로 되풀이됐고 특히 파리에서는 발레리나로 등록되면 매춘단속을 피할수 있기 때문에 매춘녀들은 언제나 발레리나가 되기를원했고 또 돈을 써 명단에 오르기를 시도한 사례들도 기록되어있다.예술가들에 대한 푸대접은 아마도 미술가들로부터 점차 나아지기시작해 르네상스 후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예술가들에 「거장」이나 「대가」라는 말이 붙고 또 사회적 금전적 대접도 융숭해진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발레는 적어도 18세기가 끝날 때까지 그게 아니었던 것같다. 결국 신분상승을 원하는 여인들중 미끈한다리를 갖추고 있는 여인이라면 약간의 동작을 배워 발레리나로서 등록되는 길이 좋았다. 미끈한 다리를 갖추고 있다면 이는 굳이 발레가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을 상품화하는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 된다.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에는 아직도 기쁨조다 뭐다 해서 예술가와 매춘녀들이 구분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니 이는 심히 한심한 일이다. 조선의 기녀들도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런 면에서 북한은 아직 봉건적 예술관을 벗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하기야 박정희 대통령도 가수와 모델등 대중의 예술가들을 불러 술시중을 들게 했으니 멀리까지 갈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