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주얼 의류 체인점인 「유니크로」를 운영하고 있는 일본의 퍼스트리테일링은 독특한 상품 조달 방식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로 꼽힌다. 퍼스트리테일링의 급성장은 품질이 좋으면서도 저렴한 상품 덕분에 가능했다. 대부분의 일본 소매업체들은 의류업체로부터 상품을 납품받아 판매만을 할 뿐이지만 퍼스트리테일링은 대부분의 상품을 직접 기획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현지 공장을 통해 위탁생산하고 있다.다른 소매업체들이 의류업체들에 매장을 빌려 주는 대가로 수수료를 받고 재고 위험을 의류업체에 일임하는 것과 달리 퍼스트리테일링은 스스로 상품을 기획, 위탁생산하고 재고도 자체 부담한다. 대신 퍼스트리테일링은 상품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가격을 낮추는 한편 상품의 독창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퍼스트리테일링의 야나이 타다시 사장은 지난해 9월말 미국과 유럽의 의류 매장을 시찰한 뒤 『퍼스트리테일링은 영국의 「막스 앤드스펜서」나 미국의 「갬프」등 유력한 소매점과 비교해 품질 대비가격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자찬했을 정도다.그러나 상품에 대한 자신감 이면에는 「우수한 상품에도 불구하고매출액은 늘지 않고 있다」는 퍼스트리테일링의 고민이 있다. 매년50개 정도씩 신규 점포를 늘려온 덕분에 98년8월 회계연도의 매출액과 경상이익은 각각 8백31억엔과 63억엔으로 11년 연속 증가를기록했지만 기존 점포의 매출액은 전년 실적을 크게 밑돌았다. 1개 점포당 월평균 매출액이 2천3백만엔으로 4년전에 비해 13% 가까이 떨어진 것이다.기존 점포의 매출액 증가율과 순이익률을 비교해봐도 퍼스트리테일링이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97년8월기에는 상품을 풍부하게 진열한 결과 매출액은 올라갔지만 대량의 재고가 발생, 순이익률이 급감했다. 반면 98년8월기에는 전년의 실수를 만회하고자상품의 양을 줄인 결과 재고가 줄어 순이익률은 개선된 반면 인기있는 상품이 조기에 품절되는 등 팔린 상품의 양이 급감, 매출액이줄었다.퍼스트리테일링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소비자의 요구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판매함에도 불구하고 퍼스트리테일링이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답은 본부의 엄격하면서 획일적인 점포운영에 있다. 『각 점포를 책임지고 있는 점장들은 본부의 지시를충실히 따르는 로봇같은 존재』라는게 퍼스트리테일링 관계자의 자조 섞인 고백이다.이런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에피소드도 있다. 한 고객이갑자기 아이가 아프다고 하는 바람에 급하게 매장에서 전화를 빌려쓰고 싶다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점원은 점포 운영 매뉴얼에 전화를 빌려준다는 항목이 없다는 이유로 이 요구를 정중히 거절했다. 점포 운영 매뉴얼에 지시된 대로만 따라하는 퍼스트리테일링의 경직성을 단적으로 드러낸 일화이다.이런 경직성과 획일성은 상품 판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점포의입지에 따라 팔리는 상품과 팔리는 시기, 팔리는 양 등은 차이가날 수밖에 없다. 원래 각 점포의 점장이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매장에서 고객이 가장 원하는 상품이 무엇인지 예측, 상품을 확보하고 소비자의 시선을 끌수 있도록 상품을 진열해야 한다. 그러나퍼스트리테일링의 경우 매장의 어느 곳에 어떤 상품을 어떤 식으로진열해야 하는지가 본부에서 일괄적으로 내려오고 각 점포는 여기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 상품을 보충할 때도 본부가 전점포에 일률적으로 설정한 재고량에 따라 배송 데이터로부터 자동적으로 납품된다. 이 때도 색이나 사이즈별로 구분해서 제품이 납품되는 것이아니라 상품 종류별로 배송된다. 예를들어 A점포에서는 빨간색 셔츠가 잘 팔리고 B점포에서는 검정색 셔츠가 잘 팔린다 해도 A점포나 B점포에 배당되는 셔츠의 빨간색과 검정색 비율은 같다. 점포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도입한 재고 관리 시스템이 오히려 각 점포의 재고 관리를 비효율적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퍼스트리테일링도 이런 획일적인 점포 운영의 문제점을 파악, 지난해초부터 재고 관리와 상품 진열 방식을 각 점포별로 독자적으로결정하도록 했다. 『상품이 왜 잘 팔리는지, 왜 안 팔리는지는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점포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각 점포 판단에맡기기로 했다』는게 퍼스트리테일링 야나이 사장의 설명이다.◆ 경직·획일성, 판매에 마이너스이런 결정은 당연한 듯이 보이지만 퍼스트리테일링으로서는 혁신이다. 퍼스트리테일링은 현재 발전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본부의집중적인 관리 방식을 기반으로 급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퍼스트리테일링은 10년간 점포수가 10배인 3백25개로 급증, 점장을 육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실제로 퍼스트리테일링의 평균점장 연령은 28세에 불과하다. 대학 졸업후 1년반 정도면 점장이될 수 있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을 점장으로 승진시켜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본부의 지시 사항을강조할 수밖에 없었다.퍼스트리테일링은 지난해 점포의 재량권을 강화하는 개혁을 단행하면서 슈퍼바이저란 직위를 새로 만들었다. 슈퍼바이저는 6∼7개 점포를 관리하면서 각 점포의 요구 사항과 소비자 정보를 본부에 전달하고 신상품이 점포에서 실제로 판매될 수 있는지를 점장들과 함께 조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마디로 본부와 점포를 연결하는다리 역할로 점장들의 경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이다.점장이 되기 위한 평가 항목도 개선했다. 이전에는 본부의 지침에잘 따르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전체 평가에서 40%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제는 본부 지침 준수 여부는 아예 평가항목에서 제외했다. 대신 판매 예측을 잘 하는지, 인건비를 예산범위내에서 잘 활용하는지 등을 중시하고 있다.그러나 퍼스트리테일링의 이런 점포 재량권 확대 조치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재 육성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 오랫동안 본부의 지시만을 따라왔던 점장들이 갑자기 「스스로 생각하고판단하는」 점장으로 탈바꿈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또다른 과제는 코스트 증가 문제다. 각 점포별 특성에 따라 필요한재고를 다르게 보충하기 위해서는 각 물류센터에서 각 점포별로 제품을 재분류한 뒤 배송해야 하기 때문에 물류 코스트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중앙집중에서 개별 점포중심으로 변신을시도하고 있는 퍼스트리테일링의 모습은 체인 유통업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원래 체인점은 본부가 상품조달과 판촉, 예산 관리, 출점, 인사 등을 모두 계획하고 점포는본부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면서 판매에만 전념한다는 개념이다. 체인 본부는 많은 점포들을 거느린 덕분에 강력한 구매력(바잉파워)을 무기로 대량의 상품을 저렴하게 조달, 각 점포에 분배할수 있었다.그러나 이런 체인점은 수요가 공급보다 많는 시대에나 통하는 유통방식이다. 요즘과 같이 수요가 공급을 밑도는 시대에는 기존 체인점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혁신의 주역은 개별 점포가 돼야 한다. 본부의 역할은 점포에서 어떤 상품이 잘 팔리는지, 앞으로 어떤 상품이 잘 팔릴 것인지 등에 대한 정보를 모아 상품을 개발, 각점포에서 예측한 양대로 조달하는 것이다. 공급부족시대에서 공급과잉시대로 이전하고 있는 환경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유통업체만이 국경없이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승자로 살아남을수 있을 것이다.닛케이 비즈니스 최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