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통합, 판매 역효과 될 수도... 헐값에 인수하면 '짭짤'

미국 뉴욕의 5번가에 자리잡고 있는 구치 본사의 직영매장. 모델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특유의 걸음걸이로 둘러선 직원들 사이를걸어다니고 있다. 이 자리는 구치의 수석 디자이너 탐 포드의 봄신상품 컬렉션을 소개하는 자리다. 이번 시즌에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새로운 아이템은 엷은 자색의 6천4백달러짜리 남성 바지. 라인스톤과 구슬, 깃털을 넣어 번쩍거리는 줄이 덧대어져 있다. 구치의 한 세일즈맨은 『이 바지 하나의 무게가 우리 집 사냥개의 두배나 된다』면서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지금까지 주류를 이뤘던 구치의 전통적인 흑색과 회색 색상과는 대조적으로자극적인 색상과 이국적인 강렬함을 갖고 있는 포드의 소재는 이제까지와는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낼 것으로 보인다.패션계에서 포드는 언제나 현재 유행하는 것보다 앞선 감각을 선보이며 자신의 솜씨를 자랑해 왔다. 전통적인 플로렌스풍의 패션업체들이 21세기에도 독립된 업체로서 예전의 명성을 유지하는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란 전망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 루이뷔통과 크리스티앙디오르, 지방시 등의 브랜드를 갖고 있는 프랑스의 호화사치품 전문회사 LVMH는 이탈리아 패션업체 프라다가 갖고 있던 구치의 지분 9.5%를 사들여 구치에 대한 지분을 14.5%이상으로 늘렸다. 하지만 LVMH의 회장이면서 유명브랜드 인수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버나드 아르노는 이것만으로 그치지는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그냥 상식적으로만 본다면 아르노가 추진하고 있는 합병은 패션업계가 현재 처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다. 6백억달러 규모의 호화 사치품시장 매출은 경기침체로 아시아, 특히 일본지역의 소비가 급감하면서 크게 축소되고 있다. 홍콩의 호화품 매출은 지난해 45%나 감소했다. LVMH사업의 70% 정도는 아시아 지역과 아시아인 관광객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가 헐값일때 유명브랜드 인수도나카란 벌거리 TAG호이에르 폴로 랄프로렌 구치 등 지난 90년대 공개한 유명 업체들 치고 현재 영업실적이 좋은 곳은 거의 없다. 도나카란과 TAG호이에르의 주식가치는 상장된 이후 각각75%와 65%로 줄어들었다. 벌거리와 허미즈 정도가 창업자쪽에서계속 지배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을 뿐 다른 업체들은 외부의 「사냥」대상으로 떠오른지 오래다. 티파니의 주가는 지난달 일본의 미쓰코시가 보유하고 있는 12%의 지분을 매각한다고 발표한이후 8%가 뛰었다.아주 헐값일 때 유명 브랜드를 인수하는 전략은 상당히 타당성이있는 일이다. 아르노가 루이뷔통을 인수한 것은 이런 전략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지난 93년 구치가 부도직전에 있을 때 2억9천만달러에 이를 사들였다가 이후 21억달러에 공개한 인베스트코퍼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인수합병이라는 것이 패션산업에서는 일반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디자인에서부터 제조 판매에 이르기까지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고수하는 것을 매력으로 삼고 있는 각 업체들이 통합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한 예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LVMH가 구치를 인수한다면 두 업체가 원료를 조달하는 노하우 정도는 서로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효율성을 제고한다는 명목으로한 공장에서 루이뷔통과 구치 핸드백을 한꺼번에 대량생산한다는것은 어불성설이다. 허미즈가 켈리핸드백 하나를 만드는데 BMW한 대를 조립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더 긴 17시간이 걸린다고자랑하는 것이 먹혀들어가는 것이 이 업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모건스탠리의 전문가 클레어 켄트는 패션업계에서는 통합을 통한원가절감이란 명분은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잘라 말한다. 카티에르 던힐 피아제 등의 브랜드를 갖고 있는 스위스의 리치몬트와LVMH 두 개의 큰 회사도 아직까지 시너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리치몬트는 몽블랑 필기구 공장에서 카티에르 만년필도 함께만든다는 루머가 나돌면서 소비자들이 떨어져 나갈까봐 이를 잠재우느라 고심하고 있다.◆ 광고비 삭감, 기업파산과 직결될수 있어주요자산이 고정된 설비가 아닌 이런 종류의 사업은 통합이나 제휴를 추진하는데 아주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가업으로 발렌티노를 오랫동안 경영해온 발렌티노 개러바니가 지난해 3월 이업체가 이탈리아의 HDP에 넘어갔을 때 절망에 가까울 정도의 슬픔을 나타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보다영향력이 더 큰 포드는 구치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구치그룹의 연례보고서조차도 그의 승인이 없으면 발표될 수 없을 정도다. 패션에 뭉칫돈을 써대는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고객들에게는 명사의 퍼스낼리티가 바로 브랜드와 동일시된다. 실제로 구치직영매장에서 1천8백달러짜리 악어가죽 신발을 구입한 한 소프트웨어 컨설턴트는 『구치 브랜드를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포드가 구치를 떠난다면 더 이상 구치 제품을사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했다.사실 고가 브랜드로 더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이제누구도 거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가 제품을 중저가 제품으로바꾸면 단기간에 많은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 하지만 TAG호이에르가 이미 시도했던 것처럼 가격을 낮추는 것은 브랜드이미지를 싸구려로 만들 위험이 있다. 자금압박으로 광고비 지출을 삭감하는 것도 또다른 화근이 될 수 있다. 최근의 경기불황을 맞아광고비 지출을 10% 이상 깎은 업체들 중 2/3는 결국 업계에서 퇴출되는 신세가 됐다. 향수업체들과 같이 두드러지게 브랜드를 확장한 경우, 대부분이 도산하고 있다고 크레딧스위스퍼스트보스톤의 한 전문가는 지적한다. 설립이후 일가족이나 설립자가 쭉 운영해 왔던 호화사치품 업체들이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는 것도 새로운 추세다. 이런 사례들 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는 지난 97년랄프로렌에서 근무하다 도나카란으로 옮긴 존 아이돌이 브랜드의설립자인 도나 카란보다 더 좋은 실적을 올리고 있는 경우다.구치는 일찌감치 이런 추세를 선도했다. 구치 일가족이 소유권에서 손을 뗀 후 영입된 도미니코 드솔 사장은 결코 만만치않은 이분야 시장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아시아에서의 자산가치 하락을 오히려 프랜차이즈 장악에 이용하는 등 공격적 경영을 펴고 있으며 자사 브랜드 중 라이선스가 만료된 제품을 도로 사들여 직영점포에서의 지분을 확대시켰다. 회사는 아시아의 중년관광객들을 위한 중저가 장신구들을 만드는데서 지역의 젊은 고객들을 겨냥한 의류제조로 관심을 돌려 많은이득을 봤다. 따라서 광고도 점점 더 유행에 민감한 쪽으로 전개돼 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구치의 주식을 비교적 헐값에 사들인 아르노가 통합 등 브랜드에 대미지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액션을 취하기 보다는 현재의 지분만 움켜쥐고 투자이득을 노리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Don't mix your designers」 Jan. 16th,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