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해동안 경제위기의 원인을 추적하고 그 대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기업위기 특히 재벌의 위기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기업구조조정의 틀도 당연히 재벌개혁쪽에 무게가 실렸다. 재벌은 80년대 이전까지만 하여도 강력한 추진력과 모험정신으로 무장된 경제성장의 핵심주체였지만 90년대 들어 정경유착, 경영세습, 부의 편중 등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공룡이란 사회적 지탄을 받아왔다. 기업구조조정에 관한 정부의 입장은 기업의 자율성을 원칙으로 한다고 했지만 이러한 비판에 힘을 얻어 재벌에 관한 한 정부주도의 구조조정이 강력히 추진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금융실패와 경영실패 못지않게 정부의 정책실패가 더 근원적인 문제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저간의 맹목적 비난에 대한 억울한 감정과 할 말도 많을 것이다. 어떠한 정책방향이든 찬반 양론의 주장에 균형을 가져야 하며 그 추진의 속도 강도 우선순위 등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고뇌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한데 재벌들의 입장을 대변할 식자층이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간 진행되어온 지배구조 조정과정에서 보더라도 이사회개혁, 소수주주권 행사요건의 대폭강화, 기관투자가활동의 강화, 적대적 M&A를 포함한 기업지배권 시장의 전면개방 등 실로 엄청난 제도변혁을 강행했다.그러나 이제 잠깐 제도 일방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변혁의 주체인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기업, 특히 대기업들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대중적 지지기반마저 흔들리는 사면초가에 처해 있다. 5대재벌그룹을 빼놓고 재벌이란 호칭마저아까운 빈사지경이 아닌가.시민단체가 벌이고 있는 소액주주운동은 명분상 매우 설득력이 있어 장점만 보면 대중의 환영을 받을 만하고 때로는 시원한 일면도 있다. 그러나 일부 소액주주는 기회주의적 행동에 의하여 결과적 행동이익이 그 비용을 능가하게 되면 반사회적 전략적 행동도 서슴지 않게 될 것이다.더욱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경영간섭 사례가 증가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경영권 분쟁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증가와 고급기밀의 경쟁사 유출 등 부작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선진국에서는 특별검사제의 후퇴에서 보듯이 소송남발과 경영권침해 등의 후유증 때문에 U턴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이제 살길은 경영혁신이요 성과중심의 책임체제밖에 없음을 대기업 지배주주와 경영진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벼랑 끝까지 왔으니 한발 비껴서 지켜봐야 한다. 민주주의 역기능이 지역·집단 이기주의로 확산되어 도처에 깔린 지뢰의 뇌관을 터뜨리지 않도록 언론, 노조, 학생운동, 시민활동단체 등은 선동적 운동에 앞서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기업들이 사업할 맛을 잃고 죽지 못해 기업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야 벤처를 포함한 기업가 정신이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정부 또한 상하단체를 비롯한 방만한 자신의 조직부터 환골탈태하는 구조조정의 모범을 보여야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주주행동주의가 그 실(失)을 감안하여 우리 국민의 기와 신명(Vitality)을 살리는 범시민운동으로 전개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