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카 레이싱 산증인, 호주 랠리 우승으로 명성 ... 드라이빙 스쿨 개설 후진 양성

『무수한 별빛이 쏟아지는 사막을 끝없이 질주해본 사람만이 카 레이싱의 참 맛을 알 수 있습니다. 고독하고 힘겹긴 하지만 수많은 고비를 넘기고 난 뒤의 후련함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카 레이서 박정용씨(40)는 선수로는 환갑을 훨씬 넘긴 거나 다름없는 불혹의 나이에도 레이스를 펼친다. 국내 프로팀에서 난다 긴다하는 20대 초반의 젊은 카 레이서들도 늘 그를 경계한다. 올해로 벌써 13년째. 그의 경력 자체가 우리나라 카 레이싱의 산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설명하기 위해선 「최초」 「최다」등의 수식어를 동원해야 한다.박씨는 지난 87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렸던 「한국자동차 경주대회」에 출전, 처녀 우승을 따냈다.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장 잘 타는 사람」이 됐지만 크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다. 당시 전반적인 사회환경은 레이서를 공인받은 폭주족 정도로 알았다. 상금도 미미했다. 그럼에도 그의 우승행렬은 이어진다. 94년까지 비포장도로 부문의 레이스에서 최다 우승경력을 쌓았다.각 대회의 성적을 합산해 랭킹을 매기는 시리즈방식이 도입된 95년에는 초대 챔피언의 반열에 올랐다. 그 해, 박씨는 호주에서 열린 「월드 랠리 챔피언십」에 출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국제대회를 제패했다. 이어 96년 인도네시아, 97년 중국과 호주에서도 잇따라 우승했다. 이중에는 단 한시간도 자지 않고 사흘 밤낮을 꼬박 달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이같은 고군분투에도 불구, 국내 카 레이싱의 수준이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고 그는 자탄한다. 최근들어 몇 개의 프로팀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해외의 일류 레이서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한다. 그가 우승했던 95년 호주대회도 최상위급 선수들이 겨루는 코스가 아니었다고 실토한다. 나아가 자신을 포함해 국내의 어떤 선수들도 아직 「일류」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그 이유를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레이싱이 자동차산업의 기술발전과 긴밀하게 연계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처음에는 다소 엉뚱한 「변명」처럼 들렸지만 그의 설명은 일목요연하고 설득력이 있다.『자동차 경주는 레이서간의 시합이기도 하지만 경주용 차량의 경쟁이기도 합니다. 차에 내장된 기술력과 성능이 거의 승부를 결정짓습니다. 따라서 좋은 차를 타는 레이서가 우승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국내 자동차업계는 양산기준으로는 세계 10위안에 끼일지 몰라도 기술력은 그에 못미칩니다. 레이서들이 경주의 성격에 맞춰 아무리 차를 뜯어 고쳐도 한계가 있는게 사실입니다.』◆ 카레이싱은 자동차 산업 발전에 일조박씨는 국내 카 레이싱이 활성화되면 이같은 약점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레이서가 보다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끊임없이 벌이는 튜닝이 그대로 자동차 메이커의 기술축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해외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들도 신기술 개발에 앞서 레이서들과 교감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가진다고 한다. 사실 국내의 웬만한 레이서들은 경주용 차량을 자유자재로 개조한다. 경주대회 규정을 어기지 않는 범위내에서 엔진을 포함한 모든 자동차부품을 만진다. 특히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레이서들로서는 안전과 관련된 기술에 일가견을 갖고 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선 고도로 숙련되고 단련된 기술자들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또 이런 레이서들이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할 경우 자동차 회사들이 얻는 이득도 작지 않다는 설명이다. 『제가 97년 호주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는 처음으로 국산인 금호타이어를 장착했었습니다. 그랬더니 호주 영국등지로부터 금호타이어에 상당한 정도의 주문이 뒤따랐습니다.』사실 국내 환경은 레이서들에게 그다지 이롭지 못하다. 차량 개조에 대한 당국의 시각은 엄격하기만 하고 스폰서를 잡기도 어렵다. 박씨는 한때 담배업체 말보로와 1년단위의 스폰서 계약을 맺기도 했으나 95년부터 경주용 차량에 담배광고 부착이 금지되면서 담배회사로는 더 이상 스폰서를 구하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카 레이서들을 「먹여살리고 있는」 스폰서들은 다름 아닌 담배업체들이다. 박씨의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박씨는 향후 자신의 목표를 두가지로 설정했다. 하나는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레이싱을 하는 것이다. 요즘 들어 체력에 대한 부담을 느끼기는 하지만 경기를 가려가면서 출전하면 앞으로 10년은 거뜬하단다. 당장 눈여겨 보아둔 레이싱도 있다. 오는 7월 강원도 평창에서 열리는 비포장도로 랠리. 국내 최초의 랠리인만큼 반드시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어 올해중 경남 창원을 출발해 북한 금강산까지 남북을 종주하는 레이스 출전도 계획하고 있다.두번째 목표는 체계적인 후진 양성이다. 후배들이 자신처럼 척박한 환경속에서 레이스를 벌이지 않도록 최대한 도와줄 생각이란다. 그는 이미 경기도 용인에 자동차 경주팀 「인터내셔널 레이싱팀」을 창단, 4명의 후배 레이서들을 지도하고 있다. 또 용인 에버랜드내 스피드웨이에서는 정기적으로 「드라이빙 스쿨」을 열고 있다. 당장은 도와주는 스폰서가 없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심정으로 시작했다고 한다.『국내에서 레이싱으로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는 생각은 벌써 접어 넣었습니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박씨는 『카 레이싱이 진정한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길 바랄 뿐』이라고 말을 맺는다. 오랜 레이싱으로 단련된 그의 몸매는 여전히 탄탄하고 눈매 또한 승부사의 그것을 잃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