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실업문제가 보통 심각한게 아니다. 4월중 실업률이 통계작성이후 사상 최악인 4.8%를 기록했는가 하면 연말까지는 무려 5.6%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난 80년대까지 「팍스 자포니카」(Pax Japonica)를 구가하며 고성장과 저실업률을 자랑했던 일본식 경영·경제시스템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도성장을 가능케했던 경제시스템이 제 궤도를 이탈하면서 일사천리로 무너졌다는 분석이다. 일본도 스스로 지난 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부르고 있다.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제도 피로」에서 찾고 있다. 종신고용과 연공서열로 대표되는 일본식 고용제도, 「행정제도」를 통한 실질적인 자국기업 보호, 세계로부터 부러움과 질시를 동시에 받았던 관민 협조체제, 규격화 평준화된 「회사 인간형」의 대량배출, 톱엘리트 관료들이 자리잡은 대장성과 통산성 등은 80년대말까지 일본이라는 거대한 「주식회사」를 세계 최강의 「기업」으로 일군 원동력들이었다.그러나 이와 같은 전체주의적인 경제시스템은 90년대 들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제도 피로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행정보호에 익숙해져 있던 금융기관들은 무한경쟁과 글로벌화로 대표되는 세계경제의 체칠변화를 외면했다. 버블 붕괴이후 나타난 금융시스템의 불안정은 지금도 그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전후 최악의 불황으로 이어졌다. 「복제」되다시피 쏟아져나온 「회사형 인간」들은 개성과 창의력을 상실한채 경쟁의 뒤켠으로 밀리고 있다.패전후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세대는 농촌을 떠나 도시의 제2차, 3차 산업역군으로 유입되면서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그러나 잔업을 불사했던 이들 기업전사는 최근 자신들이 일본기업에 의해 지속적으로 주입됐던 「2개 환상」의 희생양이었음을 자각하기 시작했다.첫번째는 「성장의 환상」이었다.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이 의미하듯 일본기업은 영원히 성장할 것이라는 환상이었다. 다른 하나는 「공평의 환상」이었다. 성장의 환상이 고용제도의 하드(hard)한 면을 지탱해왔다면, 공평의 환상은 일본식 고용의 소프트(soft)한 면에 버팀목 역할을 했다. 「스타」를 배격하고 한계적 효율성보다는 화합을 중시하는 기업풍토, 에스컬레이터식 승진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대우를 보장받는다는 환상이 그것이었다.그러나 90년대 이후 대외환경의 변화를 무시한 일본식 고용제도는 2개의 환상과 함께 동시에 붕괴되었다. 고령화 글로벌화 규제완화 등이 고용과 관계되는 대표적 환경변화의 파고(波高)였다. 70년대 25세였던 고용자의 연령이 90년대에 45세로 고령화되면서 임금부담이 커진 일본 기업들은 제로성장기를 맞아 엄청난 고민에 시달리고 있다.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은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절감하는 국가적 과제다. 그중에서도 글로벌화와 규제완화라는 세계적 추세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총론적인 대의에는 컨센서스가 모아진듯 하지만 막상 각론과 실천강령으로 들어가면 거의 중구난방에 가깝다. 이는 아직도 일본적 시스템, 일본식 가치관, 과거 영광에 대한 향수 또는 집착을 버리지 못했음을 의미한다.최근 실업관련 기사를 다룬 일본 신문들을 봐도 알 수 있다. 모일간지는 5%의 실업률은 오히려 일본식 고용의 우수성을 입증해주고 있다고 강변했다. 그 근거로 최악의 불황국면에서도 최고의 호황을 맞고있는 미국의 실업률과 비슷하다는 이유를 댔다. 일본의 제도 피로현상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