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 필자는 기회있을 때마다 재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해왔고, 현정부가 추진해 온빅딜에 대해서는 『모든 허물을 덮을 수 있는 묘수』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빅딜은 어디까지나 외자의 개입이 없는 국내 대기업간의 사업교환이고 획기적인 구조조정이라는 점을 필자로선 높게 평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금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정부의 재벌개혁 조치는 현실감각을 상실하고 있으며, 자칫 대중선동적인 성향마저 노출하기 시작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총수에대한 직접적인 강제가 여의치 않기 때문에 기업지배구조 개편을 위시한 다양한 압력수단을 개발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이로 인해 득을 보는 측은 우리 국민이 아니라 외국자본일 뿐이라는 사실이다.정부는 98년 벽두부터 다양한 외국자본 유치책을 내놓기 시작했고, 그 결과 외국자본의 국내진출은 이미 본격화됐다. 9개의시중은행 중 최소 5개가 외자 지배체제로넘어갈 전망이고, 제2 금융권 또한 빠르게 외국자본과의 전략적 제휴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소요자금의 70% 이상을 외부 자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외국계 자본이 금융산업을 장악할 경우 이들은 빠른 성장을 위한 투자를 제약함으로써 국내기업의 전략적 자유도를 심각하게 저해할 가능성이 높다.다른 한편에서는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이 증시를 통해 보유지분을 빠르게 확대하고있다. 아시아식 은행자본주의를 미국식 증권자본주의로 개편시키고자 하는 미국과 IMF의 의지는 이들 구미 기관투자가들에게 강력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이들 기관투자가들의 주주행동주의와 정부가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기업지배구조 개편조치가 맞물릴 경우 외국인 보유지분이 국내지분율을 상회하는 기업의 경영권은 손쉽게 넘어갈 수 있다.특히 외국계가 시중은행 등 금융기관을 인수한 이후에는 국내기업의 내부정보에 대한 접근이 훨씬 용이해짐으로써 적대적 M&A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멀쩡한 기업들도 위임장 투쟁(proxy fighting), 그린메일(greenmail), 공개매수(TOB) 등으로경영권 분쟁에 휘말릴 소지가 크다.따라서 현정부는 파괴의 원리만 있고 창조의 원리가 보이지 않는 현행 재벌개혁 조치를 재정비해야 한다. 재벌 총수의 전횡을 막는다는 취지하에 이것 저것 마구잡이로 통제수단을 동원할 것이 아니라, 설사시장주의자, 제도주의자로부터 맹비판을받더라도 총수 견제는 별도의 특단의 조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재벌-은행-정부의 3각축에 의한 경제주권 지키기와 고속성장 메커니즘은 그대로 살려 나가야 한다.필자로선 국내은행들을 당분간 국유화함으로써 기존의 족벌대신 은행이 재벌의 구심을 형성하는 체제가 하나의 돌파구가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부실은행은외국에 팔기 위해서라도 막대한 공적 자금의 투입이 불가피한 실정이므로 정부는 국민부담이 다소 커지더라도 해외매각과 외자유치를 중단하고 이를 당분간 직접 소유했다가 추후 경기사이클이 호전되어 부동산 담보대출 등 은행의 부실자산이 저절로양호해지는 단계에서 재차 민영화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아울러 은행은 기존 대출금을 출자전환함으로써 당분간 재벌의 지배주주의 역할을맡다가 계열사들의 구조조정이 완료된 단계에서 지주회사를 설립하여 소유권을 넘겨주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로써1인 총수체제의 폐해를 차제에 극복할 수있고 동시에 재벌의 고유한 강점인 네트워킹과 상호안전망의 체계를 외자의 공세 앞에서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