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 화학ㆍ철강ㆍ자동차 등 계열사 구조개혁 촉발

매달 두번째 금요일이면 미쓰비시 그룹의 29개 계열사 사장들이 점심회동을 갖는다. 「금요 클럽」의 좌장은 오랜 전통에 따라 미쓰비시상사의 회장이 맡는다. 세련된 영국식 매너를 갖춘 마키하라 미노루 회장은 좌장으로 더할나위 없는 적임자이지만 그 자신은 정작 행복한 편이 아니다. 회의에서 늘 제품 브랜드나 자선단체 기부 같은하찮은 얘기만 오가는데 불만이다. 경쟁과 글로벌 경제의 심화라는상황 속에서 그룹내의 긴밀한 협력방안을 회의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마키하라 회장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일본의 6대 계열(keiretsu:재벌)은 공통된 가치관과 사업연관 그리고 복잡한 상호 주식소유로결합된 강력한 기업집단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흔들리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최대의 이유는 그룹의 중추 구실을 해온 일본의 거대은행 때문이다.이들 은행은 주식 상호소유를 통한 최대주주로서 지금까지 그룹내의자금이동을 지휘하면서 계열사들을 이끌어왔다. 그런데 최근 위협적인 외부상황이 전개되면서 이들 은행이 제구실을 못하게 된 것이다.지난 9월 일본흥업은행(IBJ)과 재벌은행인 후지은행(후요 그룹), 다이이치칸교은행(다이이치캉인 그룹)이 합병계획을 발표했다. 10월에나돈 스미토모은행(스미토모 그룹)과 사쿠라은행(미쓰이 그룹) 제휴설은 더욱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양 그룹은 전전 경제를 지배한 거대 지주회사를 지칭하는 「재벌(zaibatsu)」에 뿌리를 두고 있다.미쓰이 그룹은 최근들어 상당히 위축되었다. 반면 명문 그룹인 미쓰비시와 마찬가지로 스미토모 계열 기업들도 배타적인 집단으로 아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잇따른 은행 합병은 계열간 제휴가능성을 활짝 열어제침으로써 일본기업의 앞날에 더욱 험난한 경쟁과 구조개혁을 예고하고 있다.◆ 중공업 등 핵심기업은 건재미쓰비시 그룹이 이런 추세에 예외일 수는 없다. 석유화학과 자동차, 금융 산업의 세계화로 말미암아 일본 기업들은 더욱 왜소하고고립된 처지로 몰렸다. 이제 세계화에 뒤질 수 없다는 각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지난 여름 닛코는 미쓰비시 계열 제조업체에대한 오랜 거래관계를 청산하고 미국의 시티그룹에 25%의 지분을 매각했다. 올초 미쓰비시석유는 타계열인 일본석유와 합병했다. 미쓰비시자동차 역시 외부 파트너를 물색중으로 조만간 볼보와 화물트럭생산제휴가 유력하다. 다른 그룹들도 은행과 보험 주가의 폭락 영향으로 지금까지 계열 수호의 방패 구실을 해온 주식 상호소유가 후퇴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그러나 미쓰비시상사와 도쿄미쓰비시은행, 미쓰비시중공업 같은 미쓰비시 그룹의 핵심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를 중심으로 막강자본의미쓰비시부동산, 일본 해상운송 1위인 NYK, 최대 손해보험사인 도키오해상화재 같은 주력기업들이 움직이고 있다.마키하라 회장의 구상은 다시한번 이들 주력기업의 협력을 이끌어내자는 것이다. 문제는 단 하나, 미쓰비시 계열사들이 전통적인 제조업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 마키하라 회장은 전자상거래와 첨단기술산업 같은 이머징 분야에서 주력기업의 협력을 촉진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룹을 성장산업 쪽으로 변모시킬 새 벤처기업들을위한 「인큐베이터」 역할을 그룹이 떠맡자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마키하라 회장은 이를 「전통의 일본 외에 미래의 일본도 담당하려는 것」이라고 표현한다.그러나 역량을 내부로 돌리자는 구상은 좋지만 미쓰비시 계열기업이처한 외부환경은 얻기보다는 잃을 가능성이 더 큰 상황이다. 벌써이같은 우려가 금융 계열사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앞서 발표된 합병계획에 따라 탄생할 두 「금융 공룡」은 막강한 도쿄미쓰비시은행보다 덩치가 휠씬 크다. 최근까지 일본내 자산규모 1위를 자랑해온 도쿄미쓰비시은행은 이제 파트너를 찾아 나서야 할처지에 놓였다. 그것은 특히 닛코증권이 이탈하면서 대출영업 중심에서 투자금융업 같은 수수료영업으로 전환할 목적으로 도쿄미쓰비시은행의 주식중개인을 대거 빼내갔기 때문에 보완이 시급한 부분이다.도키오해상화재 역시 10월중순 미쓰이해상화재와 일본화재해상, 고아(興亞)화재해상의 계열간 합병이 발표된 이후로 예전의 위력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주가도 형편없어미쓰비시 계열 생명보험사인 메이지생명도 곤경에 처하긴 마찬가지다. 일설에는 은행 합병을 계기로 제휴관계인 생명보험사들도 합작회사 신설 등의 방식으로 합병될 것이라는 얘기도 떠돈다. 하지만일본의 은행전문가들은 미쓰비시신탁이 스미토모신탁과 아주 가까운관계로 발전하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도쿄미쓰비시은행의 주수익원이면서 최근 유망 수익분야로 떠오른 연금업무도 이들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있다.미쓰비시 계열의 제조업체도 같은 곤경에 직면하고 있다. 일본 철강분야 5대기업 가운데 4개사가 다이이치칸교나 일본흥업, 후지 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삼고 있는 철강산업 분야에서도 계열간 합병이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주거래은행이 합병됨에 따라 미쓰이화학과스미토모화학이 뒤따라 합병, 1위인 미쓰비시화학을 추월할 가능성도 있다. 미쓰이와 스미토모화학은 이미 폴리스틸렌 같은 일부 사업의 합작 협상에 들어갔다. 이밖에 미쓰이와 스미토모 그룹의 시멘트와 조선 합병설도 떠돈다.미쓰비시 계열 제조업체는 규모의 경제라는 효과를 누리지 못해 특히 곤혹스러운 처지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은 발전소에서 에어컨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도 자신있게 내놓을 만한 것이 없다. 미쓰비시전력은 1, 2위인 도시바, 히타치 전력에 비해 한참 뒤처지는 3위이다.올해 일본증시는 온갖 합병 제휴설 덕분에 호황장세를 누렸지만 유독 미쓰비시 그룹의 주가만 형편없는 실적에 머물렀다. (도표)그렇다고 만회할 시기마저 놓친 것은 아니다. 도쿄미쓰비시은행의산와은행 합병 가능성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 좋은 예이다. 산와 측에서 최근 도쿄미쓰비시은행 측에 합병의사를 타진해왔다는 설이 떠돌고 있다. 당당한 지주회사로 군림했던 과거의 재벌과 달리현대의 일본 재벌 「계열」은 계열사 임직원의 정신 속에 강력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마키하라 회장이 앞서 언급한 참신한 구상을실천에 옮겨 성공한다면 그의 업적은 막강한 그룹을 지켜냈다는 쪽이 아니라 허약하기 짝이 없는 기업집단을 지켜냈다는 쪽에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Unweaving Japan’s keiretsu」 Oct. 23rd,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