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돌며 '거품경제' 위험 경고 ... 한국의 경제성장 저력 극찬

◆ 드러커에게 배운 일본드러커는 1959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해 <경영의 지평선 designtimesp=19213>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주요 기업에 대해 순회강연을 하고, 일본의 수묵화와 채색화를 최초로 구입했다. 이것은 드러커의 일본화 수집활동의 계기가 됐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후 드러커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데밍(Edward Deming) 조지프 주란(Joseph Juran) 등 많은 미국인 경영학자들을 초청했다.일본 기록에 따르면 드러커는 1959년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1960년 방일해 강연을 가졌고, 1962년에는 도쿄의 고서화 가게에서 처음으로 일본 선화(禪畵)를 감상했다. 이해 드러커는 America Management Society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1964년 4번째 방일해 순회강연을 했고, 1966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산업경영의 근대화 및 일·미 친선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 훈3등 서보상을 받았다. 1967년 America Management Association으로부터 테일러 키(Taylor Key) 메달을 받았다. 1969년 방일 때에는 「새로운 경영의 탐구」라는 주제로 도쿄에서 강연을 했다.1972년 방일시에는 「단절의 시대의 경영자」라는 주제로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지에서 순회강연을 가졌다. 1975년 방일해 「경영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라는 주제로 도쿄에서 강연했고, 이해부터 <월스트리트 저널 designtimesp=19220>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기 시작했다.◆ 일본화와 한국도자기에 대한 관심1979년에는 산장 컬렉션 전(山莊 collection)을 뉴욕 시어티 등 5개 전시장에서 개최했고, 클레어몬트 대학과 인접해 있는 포모나 대학(Pomona College)에서 동양미술강좌 과목의 강사에 취임해 1985년까지 강의했다.1980년 방일해 <변화시대의 경영 designtimesp=19227>(Managing in Turbulent Times)의 일본어판 출판기념으로 도쿄와 오사카에서 강연했다.1982년 방일해 <변모하는 경영자의 세계 designtimesp=19230>(The Changing World of the Executives)의 일본어판 출판기념으로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지에서 7차례 강연했다. 1985년 방일해 <혁신과 기업가 designtimesp=19231>(Innovation and Entrepreneurship)의 일본어판 출판기념으로 도쿄와 오사카에서 9차례 강연했다.1986년에는 「드러커 컬렉션 수묵화 명작전」전시회를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지에서 4차례 가졌고, 「변하는 세계경제와 일본의 영향」이라는 주제로 도쿄 오사카 센다이 등지에서 5차례 강연을 했으며 77세를 기념하는 「희수(喜壽) 축하파티」를 가졌다.1992년 말 필자가 드러커 자택을 방문했을 때 드러커는 『내가 후회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40년 전부터 한국의 도자기를 수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도자기는 고려시대의 청자로부터 이조백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계 최고의 완벽한 도자기인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적 보물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드러커의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1998년 말 드러커를 만났을 때 최근 그는 남미의 도자기를 수집한다고 했으며, 우리는 많은 시간 동안 미술관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의 미래에 대한 예언1989년 <새로운 현실 designtimesp=19240>(New Reality)의 일본어판 출판기념으로 방일해 「새로운 현실-다가올 지식사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도쿄 및 오사카에서 5차례 강연을 가졌고, 「80세 생일축하파티」에 참석했다.1990년 방일해 「격동의 시대 - 21세기의 도전」이라는 주제로 도쿄와 나고야에서 강연했다. 1993년10월25일 기록상 15번째 방일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designtimesp=19243> 일본어판 출판기념으로 도쿄와 교토에서 강연했다. 드러커는 강연에서 『지금 일본은 등대가 없다』고 지적했다. 『과거 일본은 1억인구가 다함께 먹고 살자,그리고 미국을 따라 잡자는 2개의 등대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강국이 된 일본은 지금 등대가 없다』고 했다.(이 강연 전후부터 일본은 거품경제가 꺼지고 깊은 불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드러커는 한국동란이 끝난 후(1954년 경으로 추측됨)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한국의 교육문제를 점검하기 위해 처음으로 우리 나라를 방문했고, 1977년 두번째로 방문해 세계중소기업대회에서 주제 발표를 했다.필자는 드러커를 개인적으로 1992년, 1993년, 1997년 그리고 1998년 말 네 번 만났다. 세번은 미국 클레어몬트 자택에서 그리고 한번은 일본(1993년)에서 만났다. 드러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designtimesp=19252>의 한국인을 위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역사에 기록된 것 가운데 한국전쟁 이후 40년 동안 한국이 이룩한 경제성장에 필적할 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성과에 내가 한몫(물론 조금이지만)을 했다는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뉴욕대학의 대학원(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는 클레어몬트 대학)에 있을 때, 나는 해마다 뛰어난 많은 한국의 학생들을 나의 클라스에서 가르쳤습니다.졸업 후 그들은 대부분 귀국해서 우수한 교육자가 되었고, 유능한 경영자가 되었으며 그리고 훌륭한 정부관료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나라도 나라 바깥(특히 미국으로부터)에서 얻을 수 있는 교육 자원을 이렇게 현명하게 이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교육에 대한 투자로부터 그렇게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던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습니다.』이제 어느 나라든지 국가가 생산을 주도하고, 애국심을 동원하는 것은 곧 한계에 부딪친다. 나라 사랑만으로는 금방 지친다는 뜻이다. 애국적 사회주의 쿠바처럼 하나의 신화이다. 뿐만 아니라 드러커는 첨단경쟁시대에는 성실만으로는 곤란하다고 지적한다.자본과 노동의 역할이 끝나고 지식이 주요한 생산요소가 되는 지식사회 그리고 지식경제학에 있어서 경제정책은 케인지안의 소비(유효수요정책)나 오스트리아학파의 투자가 아니라 지식의 적용이 가장 우선되는 정책 즉, 경영자에 의한 지식의 응용정책이어야 한다. 이것이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 주는 시사점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