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14일부터 정치활동에 들어갔다. 시민단체처럼 낙천·낙선 대상자 명단을 발표하지는 않을 방침이지만 국회의원들의 기업활동과 연관한 의정활동을 면밀히 평가하게 된다.경제 5단체와 업종별 단체로 구성된 경제단체협의회는 14일 총회를 열고 정치활동 전담창구인 의정평가위원회 구성을 공식 의결했다. 경제 5단체 상근 부회장과 학계 언론계 인사 등 20여명으로 구성되는 의정평가위는 이달말 첫 회의를 열고 노사문제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성향을 분석, 책자로 만들어 회원들에게 배포하게 된다.물론 재계는 뚜렷한 목적과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 정치인에 대한 평가활동을 벌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선거분위기를 혼탁하게 만들지는 않겠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활동 시기도 총선이후인 하반기로 잡았다.재계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정치권은 긴장하고 있다. 반드시 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을 갖춘 재계가 공동 보조를 취할 경우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서다. 의원들 입장에서는 재계의 의정활동에 대한 평가에 따라 정치자금 모금길이 막힐 수 있다. 의원 입장에서는 노동단체와 재계사이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히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부작용을 감안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게 좋을 것』이라는 남궁진 청와대 정무수석의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새천년 민주당과 한나라당 등 여야도 한 목소리로 재계의 정치활동을 걱정하고 있다.◆ 총선 영향 고려, 활동은 하반기에그러나 재계의 정치 참여문제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 1965년 정치자금 양성화가 입법화되는 과정에서 경제인협회는 어차피 정치자금을 낼바에는 후보를 추천하자는 의견이 제기됐었다.61년 부정축재자 처리법안 심의 과정에서 재계를 대변하는 의원이 없어 수모를 당한데 따른 반응이었다. 일각에서는 혁신 세력의 부상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경제인협회는 7인 수습위원회를 구성, 난상토론 끝에 국회의원 추천안을 부결시켰지만 재계의 정치참여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최근 재계가 다시 정치 참여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은 노조전임자 임금지급문제 등의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총선 후 노동단체와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재계로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경제단체도 이익단체로서 적절한 수위의 정치참여는 당연하다는 것이다.손병두 전경련 상근 부회장도 『시민단체가 벌이는 낙선 운동을 하지 않겠다』며 정치참여 활동수준을 분명히 밝혔다. 발전적인 정치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이익단체의 활동으로 해석해주길 바라는 눈치다.그러나 전문가들은 재계의 정치활동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처음에는 노동관련법과 관련해 제한적인 활동을 벌인다고 해도 추후에 성격이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돈줄을 쥐고 있는 재계가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서면 혁신세력의 정치기반이 급속히 위축될 수 있다. 결국 보수와 혁신진영간 균형이 깨지게 된다.여당의 한관계자는 『이같은 점을 반영해 재계는 정치활동의 수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동단체는 재계의 정치활동참여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활동방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계의 정치참여는 정치 세력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기본 취지가 지켜져야 건전한 정치문화가 정착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