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사무실 운용, 경비절감 극대화 … 창업 2년만에 라이코스사에 팔아 ‘돈방석’

‘불필요한 경비는 과감히 줄여라.’ 국내외를 막론하고 기업들이 경영 효율을 높이기 위한 제1 과제로 추구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경비 절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들이 택하는 경비 절감의 메뉴는 뻔하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인원을 정리하거나 통신, 접대, 자재구입 등 경상비용을 긴축하는 것 등이 고작이다.미국의 인터넷 서비스 회사인 발렌트 소프트웨어사가 선보인 경비 절감책은 이런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97년 가을에 설립된 이 회사는 우선 사무실부터가 없다. 임직원을 모두 합쳐봐야 10명뿐인 벤처 단계의 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파격적이다. 직원들이 제각각 살고 있는 자택에서 회사 업무를 처리한다. 전원이 재택근무를 하는 이색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대표이사 회장은 동북부의 매사추세츠주에서 살고, 사장은 그곳에서부터 자동차로 80~90시간을 달려가야 하는 서북부의 유타주에 떨어져 살면서 업무를 본다. 그런가 하면 엔지니어링 팀은 중북부의 오하이오주에서 지낸다. 각각 자택 내의 식당이나 지하 공간이 사무실이다. 휴대폰과 e-메일로 통신을 나누고, 직접 만나서 공동 작업을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호텔 로비를 이용한다. 매사추세츠의 워번이라는 소도시에 소형 사무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각종 우편물을 받기 위한 ‘초소’일 뿐이다. 전형적인 ‘사이버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이 회사의 최고 경영자인 스콧 벤슨 회장은 이처럼 철저하게 사이버 방식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이유로 “불필요하게 경비를 낭비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무실을 운영하면 전기 온난방 통신 등 관리비에서부터 사무 비품 등으로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는 게 사실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시대에 불필요한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돈을 낭비하는 것은 ‘사치’일 뿐이라는게 벤슨 회장의 지론이다.발렌트사가 사무실을 두지 않은채 사이버 기업으로 출범하게 된데는 나름의 사정도 있다. 회사의 공동 창업자 3명이 서로 많이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 첫째 이유다. 벤슨 회장은 매사추세츠주의 벤슨에 집이 있었고, 컴퓨터 창업 전문가로 사장을 맡은 앤소니 안토누치오는 유타주의 파크 시티에, 컴퓨서브사의 인터넷 엔지니어 출신으로 엔지니어링 팀장에 취임한 리 터너는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 각각 살고 있었다. 30~40대 나이의 이들은 아이들 학교 문제도 있는 데다가 각각의 타운에서 기반을 닦은 터라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결국 이들은 각각의 기존 집에 살면서 회사를 함께 꾸려나가는 방도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내친김에 7명의 직원을 채용하면서 이들도 재택근무를 시켰다. 그러다 보니 발렌트사의 임직원들은 2년이 넘게 한 회사에 근무하면서 서로 일면식도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선임 엔지니어로 있는 앤 스위니는 “비록 얼굴을 본 적이 없는 회사 동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색하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 “회사의 업무가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분야여서 동료들이 모두 사이버 의사 소통에 익숙해있는 데다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유대 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이들은 의사 소통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했다. ‘발렌트 클럽 온라인’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인터넷을 이용한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발렌트의 임직원들은 수시로 회의도 열고 삼삼오오 잡담을 나누기도 하며, 서로 갖고 있는 자료를 주고 받기도 한다. 실제의 사무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이 ‘온라인’을 통해 빠짐없이 다 해낸다. 이 ‘발렌트 클럽 온라인’은 이 회사가 일반 소비자들을 고객으로 모집해 상업적으로 운영하는 회사의 간판 상품이기도 하다.실제와 가상의 공간을 구분할 수 없으리만치 정교하게 프로그램을 운영하다 보니 임직원들 간에 스스럼없는 의사 교환이 시도 때도 없이 이뤄진다. 안토누치오 사장이 마케팅 분석담당 직원에게 즉석 메시지를 보내 “어이, 아까 맡긴 일 어떻게 돼가고 있어?”하고 묻는 식이다. 마치 사무실 문을 노크하면서 말을 건네는 것과 같은 느낌이 전달된다는게 직원들의 얘기다.이처럼 실제의 공간에서 서로 마주보며 일을 하는 것이나 별로 다를 게 없는 효과를 내면서 재택근무에 따르는 이점도 그대로 누린다. 사생활을 충분히 보장받는 것이다. 맡겨진 업무를 주어진 시간 내에 처리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우선 순위에 구애받지 않고 집안 일 등 사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게 빼놓을 수 없는 강점이다. 아이들을 등하교시키는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일을 하다 졸리면 충분히 낮잠도 즐길 수 있다.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과 잠시 함께 놀아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결과로 말할 뿐이다. 낮에는 다른 일을 보고, 새벽 2시에 회사 일을 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는게 회사 관계자의 얘기다.◆ ‘매각’ 목표 창업 붐 … 경비절감 지상과제이렇게 효율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다보니 호시탐탐 기업 사냥이 이뤄지는 미국의 M&A(합병 및 인수) 시장에서 발렌트사가 최고의 사냥감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물론이다. 마침내 발렌트사는 지난 2월 중순 인터넷 포털업체인 라이코스사에 팔렸다. 주목되는 것은 이 회사의 ‘몸값’이다. 50만달러 가량의 밑천으로 2년반 전 출범한 이 회사가 라이코스에 넘어가면서 챙긴 매각 대금은 자그마치 4천5백만달러였다. 회사 가치가 2년 남짓한 사이에 90배나 불어났다는 얘기다.라이코스사측은 그러나 “발렌트사를 인수하기 위해 그만한 돈을 쓴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밝혔다. “우리가 인수 대상 회사의 값어치를 셈할 때 따지는 것은 그 회사의 상품과 고객 규모 그리고 매출 추이 등이다. 회사 사무실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게 론 시지 라이코스사 부사장의 얘기다. 라이코스사는 발렌트사가 개발해 보유하고 있는 웹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온라인 클럽 네트워크를 확충하는 데 집중적으로 이용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재미있는 것은 발렌트사가 처음부터 매각을 전제로 창업해 운영돼 온 회사라는 사실이다. 이 회사의 공동 창업자 3인은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른 시간내에 회사 가치를 최대화해 많은 돈을 받고 팔아치울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한 끝에 사이버 사무실 운영 등 경비 절감 극대화 전략을 도입했다고 한다.안토누치오 사장은 이미 10여년전 서른살의 나이때 비보 소프트웨어라는 비디오 컨퍼런스 회사를 창업한 뒤 고가에 매각, 백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전력이 있는 ‘창업 전문가’였다.비단 발렌트사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벤처 기업들 가운데 상당수는 ‘매각’을 목표로 창업된다는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인터넷 조사 기관인 포레스터 리서치사의 샬린 리 전문위원은 “요즘 회사를 창업하는 벤처 기업인들에게 언제쯤 기업 공개(IPO)를 계획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엉뚱한 대답이 돌아온다”고 말한다. “IPO를 왜 하느냐, 그 전에 회사를 팔아치울 건데”라는게 그 대답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아메리카 온라인(AOL)이나 야후 등 피인수 대상 기업을 선정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추어 회사를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처음부터 매각을 전제로 회사를 경영하노라니 불필요한 경비를 어떻게든 최소화하려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사무실을 두지 않고 사이버 공간을 통한 전임직원의 재택근무라는 파격적인 발상도 그래서 가능했던 셈이다.어쨌든 발렌트사는 미국 벤처 기업계에서 ‘최단 기간내 최고 몸값 창출’이라는 성공 스토리를 남겼다.벤슨 사장은 4천5백만달러의 회사 매각 대금이 임직원들 사이에 어떻게 분배됐는지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를 연발하면서도, “한 가지 밝힐 수 있는 것은 10명의 임직원 모두가 백만장자가 됐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2년 반 동안 사무실 없는 재택 근무를 한데 대한 사례비 치고는 ‘넘치는 대가’를 받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