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 기본 요금 결정, 발매 1년만에 4백만대 대히트 견인 … 퇴직한 뒤 제2 변신 출사표

NTT도코모(이동통신)가 일본내 주식시가총액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NTT 쾌속항진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휴대 인터넷 열풍의 확산이다. NTT도코모의 휴대전화를 이용한 인터넷 접속 서비스 ‘i모드’ 가입수가 지난 3월15일 5백만건을 돌파했다. 지난해 2월 서비스개시에 나선지 겨우 1년1개월여만이다. 언제 어디에서도 쓸 수 있는 무선인터넷의 장기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휴대인터넷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화제에 오르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NTT도코모 게이트웨이비즈니스부의 마쓰나가 마리(松永眞理·45·위 사진)기획실장이다. 마쓰나가실장은 97년7월 기획실장을 맡아 i모드용 콘텐츠를 개발했다. i모드보급을 위해 기획은 물론 개발 판촉까지도 맡았다. NTT로서는 보배같은 존재인 그녀가 3월말로 NTT도코모를 퇴직, 또다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완전히 끝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나름대로는 무엇인가를 달성했다”는게 퇴직의 변이다.어디로 옮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직업인 잡지편집분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그녀는 전직(轉職)정보지 <토바라유(전직이라는 프랑스어) designtimesp=19670>의 편집장 출신이다.◆ 마쓰나가는 ‘사회 흐름에 민감한 인물’ 평가마쓰나가실장의 i모드 성공스토리는 드라마틱하다. 그녀는 98년11월말 인터넷과 접속할 수 있는 휴대전화 서비스인 i모드발표기자회견 때 하늘이 무너짐을 느꼈다. 회견장에 모인 통신담당 기자는 고작 7명. 그들은 휴대전화용 인터넷 접속 프로토콜채용문제 등과 관련,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어댔다.쇼크는 다음날도 계속됐다. 마쓰나가실장은 1년을 투자해 개발한 i모드용 콘텐츠가 신문1면에 오를만한 획기적인 서비스로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조간에는 하찮은 기사로 다뤄졌다.그러나 언제까지나 낙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기자회견에서 왜 실패했는가를 곰곰히 생각했다. “i모드는 기술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서비스를 파는 것이다. 따라서 생활이 이렇게 변한다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호소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선전이나 마케팅 홍보부문을 장악, 설명용 자료나 비디오를 작성했다.99년1월에 열린 두번째 기자회견 때는 일반주간지 TV 스포츠신문까지 대거 불러모았다. 도코모가 TV CM에 기용해온 인기탤런트인 히로스에 료코도 초청했다. 그 전략은 적중했다. ‘마쓰나가실장이 없었더라도 i모드는 태어났을 수 있다. 그러나 마쓰나가가 없었더라면 발매 1년만에 총 4백만대나 판매되는 대히트를 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게 일반적 분석이다.마쓰나가실장은 대중을 파악하는 능력을 타고 났다. 그녀는 <토바라유 designtimesp=19683> 총괄편집장을 사직, 97년7월에 NTT도코모로 옮겼다. 그녀를 NTT로 뽑아온 에노키 게이치 게이트웨이비즈니스부장은 “마쓰나가의 발상은 NTT출신으로부터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 단적인 사례가 i모드의 파격적인 기본이용요금 결정. 당초 개발팀은 1천엔을 검토했다. 그러나 마쓰나가실장은 강력 반대했다. “잡다한 정보를 대량으로 집어넣는 i모드는 정보지 가격이 아니면 팔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결국 3백엔으로 결정했다.마쓰나가실장의 상담파트너였던 사카모토 겐 리쿠르트상무는 ‘마쓰나가는 사회의 흐름에 대해 민감한 인물’로 평가한다. “반발 앞의 미래를 발견, 사회의 흐름을 읽어내는 일이 재미있다”며 굳은 결심을 내비치곤 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그녀는 “편리해요,사지 않을래요”라며 선전하고 다녔다.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기술자와 메이커쪽과의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기술자는 시장보다 최첨단 기술쪽에 관심을 가졌고 휴대전화 메이커는 “고기능 휴대전화”를 요구했다.마쓰나가실장은 이의를 제기했다. “휴대전화는 쓰기 편하지 않으면 안팔린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고기능이라고 들으면 무언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기능이라고 하면 마음대로 쓰기 어렵다고 여기게 된다”며 첨단기술을 추구하는 기술진들과 연일 전쟁을 치렀다. 결국 i모드를 대중마켓에 내보내겠다는 주장을 관철시켰다.그녀는 이미 민완 편집장으로 이름을 날렸었다. 어떤 아이디어를 매스컴에 확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자신이 편집했던 <토바라유 designtimesp=19692>는 단순히 여성의 전직정보지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것만이 아니다. ‘여성들도 전직한다’는 것을 사회에 인지시켰다. i모드 발상과 마찬가지다.마쓰나가실장이 리쿠르트에 입사한 것은 지난 77년. 오일쇼크로 취직전선에서 헤매다가 리쿠르트에서 <취직저널 designtimesp=19695> 편집장을 맡고 있던 아카바네(현 브레인포럼사장)를 만났다. <취직저널 designtimesp=19696> 창간 1백호를 기념한 학생용 세미나에서 아카바네 편집장은 학생들에게 “취직활동은 자신과 마주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좀더 즐겨라”고 말했다. 마쓰나가는 아카바네의 설명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의 감상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 “한번 회사에 놀러오게”라는 아카바네의 한마디에 끌려 입사했다.당시 리쿠르트에는 직원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런데도 수평조직으로 짜여 있었다. 따라서 이같은 환경에 적응하는 사람은 급속 성장할 수 있었다. 마쓰나가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31세 때 <취직저널 designtimesp=19699> 편집장을 맡았다. 그때 처음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전무인 고노 광고사업본부장(현 리쿠르트사장)이 <취직저널 designtimesp=19700>의 흑자화를 지시하고 부원 20명이 만들어온 잡지를 편집장 한 사람에게 몽땅 맡겼다. 마쓰나가는 그동안 구축해온 인맥을 동원, 외부 라이터 카메라맨 디자이너 등에 협력을 요청했다. 결국 1년만에 흑자를 달성했다.◆ 2번의 위기 극복 …주변 능력 인정두번째 위기는 <토바라유 designtimesp=19705> 편집장에 취임한 33세때 일어났다. 정치권에 뇌물을 제공한 리쿠르트사건이 발생, 사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경쟁 회사가 <토바라유 designtimesp=19706>를 겨냥, 여성대상 전직지인 <사이더 designtimesp=19707> <듀더 designtimesp=19708> 등을 창간하거나 확장하며 총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2개월만에 간판잡지사로서의 위치를 되찾았다.두번의 위기극복을 통해 마쓰나가는 자신감을 얻었다. 주위에서도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TV 잡지 신문이 연일 그녀를 찾아왔다. 마쓰나가를 도코모의 에노키부장에 소개해준 인쇄회사 산카라의 하시모토 사장은 “리쿠르트에 그대로 있으면 여성문제 평론가로 끝날 것”이라며 전직을 부추겼다.마쓰나가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전직을 택했다. ‘휴대전화는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있는 미디어정보를 발신한다’는게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리쿠르트를 그만둔다는 것 보다 신규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판단했다”는게 그녀의 설명이다. 독특한 대중감지센서가 작동한 것이다. 마쓰나가실장이 도코모를 탈출, 또 다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그녀의 대중성향이 어떤 문화를 창조해낼지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