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절감 효과커 … 기업들 전문업체 대행·자회사 독립 등 구조조정

“다운사이징 위에 구매 합리화가 있다.” 미국 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대대적인 인원 감축과 조직 슬림화에 나섰던 90년대 중반, 불현듯 얻은 깨달음이었다. 무턱대고 사람을 내쫓고 조직을 잘라내는 것이 비용 절감을 위한 최선의 방책은 아니며, 기업 활동에 소요되는 각종 물품과 원부자재, 서비스 등의 구매 비용을 낮추는 것이 보다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뒤늦게 눈 뜬 것이었다.그 이전까지 기업의 구매 담당자들은 납품업자들과 흥정해가며 물자를 사들여 비축하고, 현업 부서에 적기에 공급하는 등의 뒷바라지나 하는 한직(閒職)으로 치부됐었다. 그러나 기업들의 ‘각성’ 덕분에 그늘 속에 있던 구매 담당자들의 위상은 하루 아침에 뒤바뀌었다. 기업들이 구매 부서를 중시하기 시작하면서 구매 책임자들이 부사장 등의 고위직으로 승격하는 사례가 줄을 이었다. 크라이슬러사의 경우 구매본부장이었던 토마스 스톨캠프가 일약 사장 자리에 올라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그러나 인터넷 혁명과 더불어 등장한 기업간(B2B) 전자상거래로 인해 기업의 구매 담당자들이 또 한번 기로에 서게 됐다. B2B 전자상거래가 기업들의 물품 및 서비스의 구매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음에 따라 기존 구매 조직의 재편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프리마키츠, EDS 코넥스트, 벤트로 등 기존 기업들의 구매 업무 총괄 대행을 표방하는 신생 B2B업체들이 줄지어 탄생하는 등 업계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기업 구매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이로 인해 모처럼 쬐게 된 햇볕이 금세 구름에 가리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확산되고 있다.아직까지는 B2B의 등장이 구매 담당자들에게 위협보다는 원군(援軍)의 측면이 더 강하다는 지적도 있다. 사무용품 등 소모적인 비전략 물자의 구매를 B2B 업체들에 대행시키고 전문적인 핵심 물자 조달업무에만 주력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 구매담당과 B2B간의 이런 ‘밀월’ 관계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전문가들이 많다. 아직 시작 단계인 B2B 서비스가 고도화되어감에 따라 기업들의 구매 업무를 전면 대체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단순히 구매만을 다루어 온 사람은 효용가치가 떨어지고, 재정이나 기술 등 인접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구매관리 업무를 내주게 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재무 전문가 ‘구매는 일반 업무’ 큰소리일부 기업들에서 벌써 그런 조짐이 현실화되고 있다. 유리제조업체인 오웬스 코닝사는 얼마전 최고 재무책임자(CFO)를 맡고 있던 찰스 데이나를 구매담당 총괄 책임자로 전보하는 인사 조처를 단행했다. 재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을 구매를 책임지는 자리에 앉히는데 대해 내부적인 우려와 반발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일단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됐다. 데이나는 구매 책임자에 취임하자마자 주요 물자와 서비스를 온라인 카탈로그를 통해 조달하는 등 업무 프로세스에 혁신을 꾀했다.그가 특히 야심을 갖고 추진한 것은 인터넷을 이용한 역경매 방식의 구매 시스템이었다. 인터넷 웹 사이트를 통해 구매 희망 품목의 목록을 제시하면, 공급업자들이 그에 맞는 조건을 내놓은 뒤 흥정을 통해 가격과 납품 절차 등을 결정짓는 방식이다. 오웬스 코닝사는 역경매방식을 통해서만 9백만달러 어치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데이나는 이처럼 자신의 ‘구매 실험’이 대성공을 거두자 “구매 업무는 더 이상 전문직종이 될 수 없다”며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판매, 생산 심지어 인사관리 분야의 전문 요원들이 경력 관리 삼아 2년 정도씩 돌아가면서 일을 맡아봐도 충분한 일반 업무”라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비전문가 출신의 이런 ‘도발’에 위기 의식을 느낀 기업 구매담당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만한 ‘생존 전략’을 짜내기에 부심하고 있다. 특정 기업의 구매 부서에서 자신들이 비축한 물자 및 서비스 조달 노하우를 상품화, 다른 중소기업들의 구매를 대행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구매부서가 단순히 비용 관리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당당히 돈을 버는 ‘이익센터’가 될 수도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몸짓이다. 종전까지는 소관 업무에 포함되지 않았던 잉여 장비의 처분 등을 자진해서 수임, 인터넷 경매 등의 방식으로 매각이익을 극대화함으로써 존재 가치를 과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B2B 전문업체에 소소한 구매 업무를 대행시키는 ‘정면 돌파’ 방식을 택하고는, “전문적인 구매 노하우가 있어야 이들 대행 업체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다”며 구매부서의 존립 필요성을 강조하는 정공파들도 없지 않다.실제로 철강회사인 베들레헴 스틸사 같은 경우는 구매 부서를 통해 B2B 시스템을 활용함으로써 비용 절감 효과가 극대화됐다고 판단, 구매 책임자를 부사장으로 승진시키는 포상을 실시해 담당 임직원들의 사기를 드높이기도 했다.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의 기업내 구매 기능은 이미 천수(天壽)를 다했으며, 멀지않아 B2B 등 외부 시스템이 기업 구매 업무를 완전히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만만치 않게 대두되고 있다. “앞으로 기업의 구매 업무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한 분업 형태를 띨 것이다.예컨대 재무 담당이나 디자인 엔지니어 쪽에서 구매 교섭을 맡고, 실제 조달 과정은 외부의 B2B 업체들에 외주를 주어 처리하는 방식이 보다 보편화할 전망이다”(사프완 마스리 콜럼비아대 경영대학원 부원장). B2B 소프트웨어 업체인 카스바사의 로이 그레이엄 사장은 보다 공격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향후 4년 이내에 기존의 기업내 최고 조달책임자 직위는 인터넷을 이용한 매매 관리 능력을 갖춘 영업 책임자들에게 접수될 것이다.”실제로 재무 책임자에게 조달 총괄업무를 맡긴 오웬스 코닝사의 ‘전례’를 따르는 회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통신업체인 벨 사우스사는 최근 회계감사실장을 조달 책임자로 전보했으며, 제너럴 일렉트릭(GE)사는 최고 정보책임자(CIO)로 하여금 조달 총괄업무를 겸임토록 하는 조직 개편을 실시했다.헤드헌팅 회사인 콘 페리 인터내셔널사에 따르면 기업 고객들이 물색을 의뢰하는 조달 책임자의 요건이 과거에 비해 두드러지게 변하고 있다고 한다. 조달 분야 한 우물을 파온 사람보다는 마케팅과 재무, 일반 경영 관리 등의 분야를 폭넓게 거친 사람이 더 선호되고 있다는 것이다.경쟁업체들 간에 소모적인 비용 지출을 중단하고 구매 합리화를 기하기 위한 공동 구매센터 운영이 모색되고 있는 것도 기존의 구매 담당자들에게는 위협적인 환경 변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자동차 업계에서는 이미 제너럴 모터스(GM)와 포드, 다임러 크라이슬러 등 이른바 ‘빅3’간에 공용 부품의 공동 조달을 위한 컨소시엄이 구성된 상태다. 소프트웨어 업체인 오라클과 소매체인회사인 시어즈 로벅, 프랑스 유통업체인 까르푸 등도 최근 글로벌넷 익스체인지라는 온라인 소매 사이트를 공동으로 개설하는 등 조달업무 합리화에 나섰다.◆ B2B 모든 것 맡길 경우 리스크 감안해야조달부서를 독립채산 방식으로 전환시키거나 아예 자회사로 떼어내는 등 ‘정리’의 수순을 밟는 회사들도 있다. IBM은 최근 회사내의 구매업무 경력자들을 모아 외부 회사들을 상대로 구매 대행 서비스를 제공하는 별도의 사업부를 발족시켰다. 독일 전자회사인 지멘스사의 경우는 일부 구매관련 부서를 자회사로 분리시켜 수익 사업을 실시토록 했다. 얼핏 보기에는 구매 부서의 ‘능력’을 인정하는 조처 같지만, “인터넷 B2B의 파고와 싸워서 생존할 수 있으면 알아서 하고, 그럴 능력이 없으면 스스로 문을 닫으라”는 결별 선고의 전단계로 비쳐지기도 한다.하지만 인터넷에 기업 구매의 모든 것을 내맡길 경우 그에 수반되는 리스크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충고다. B2B업체들에 물자 구매를 의뢰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이라는 공개된 마당에 조달하고자 하는 물자의 사양 등을 밝혀놓아야 하는데, 이는 자칫 기업 전략의 대외 유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또 온라인을 통한 납품업체들 가운데는 신원이 불분명한 ‘불량’ 업체들이 숨어들 수 있어 물자를 조달하는 기업에 뜻하지 않은 피해를 입힐 소지가 크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인터넷 혁명이 부채질하고 있는 ‘효율 지상주의’가 기업 경영에 만능의 묘약이 될 수는 없다는 반론도 귀담아 들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