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한 손실 못이겨 투기성 투자 포기 … 전문성 갖춘 신예 펀드 출현, 폐업 앞당겨

지난달 28일 뉴욕 맨해튼의 월가. 국제 투기자본의 대명사로 통해온 조지 소로스가 기자회견을 자청하고는 메가톤급 선언을 터뜨렸다. 그가 운영해온 퀀텀펀드와 쿼터펀드 등 헤지펀드들을 정리하겠다는 발표였다. 소로스는 이들 펀드를 투기적 성격을 배제한 일반 펀드로 개편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월가 투자자들에게는 한달여 전 줄리언 로버트슨이 이끄는 타이거 펀드의 ‘헤지펀드계 퇴출’ 발표를 능가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국제 금융계의 한 세대를 풍미해온 헤지펀드계의 양웅, 소로스 펀드와 타이거 펀드가 21세기의 초엽에서 스스로 문패를 내리게 됐다.세계 헤지펀드업계의 쌍두마차로 군림해 온 두 회사가 한달 간격으로 문을 닫는 ‘대사건’이 벌어진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에서인가. 두 헤지펀드를 파국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원인은 최근 미 증시의 난조에 따른 대규모 투자 손실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소로스의 간판 헤지펀드 회사인 퀀텀펀드의 경우 중점 보유하고 있던 인터넷 등 정보통신과 생명공학 등 이른바 ‘신경제’ 주식들의 주가 급락으로 인해 올들어 21.7%의 투자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타이거 펀드의 경우는 퀀텀펀드와는 정반대되는 사연으로 거액의 투자 원금을 날렸다. 이 회사는 신경제 기업들의 주가가 실제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과대평가돼 있다는 판단을 고수, 일관되게 투자를 외면했다. 대신 금융 화학 유통 제조업 등 ‘구경제’ 업종의 재래 거대기업 주식에 투자를 집중했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기대와 달리 지난 몇년 동안 신경제 주식들의 승승장구에 밀린채 극도의 부진을 면치 못했다.<뉴욕 타임즈 designtimesp=19758>와 <월 스트리트 저널 designtimesp=19759> 등 미국 언론들은 이들 주요 헤지펀드의 퇴출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종잡을 수 없이 널뛰는 주식 시장이 투기의 백전노장들을 KO시켰다”고 지적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천하의 헤지펀드라 하더라도 ‘투자 방정식’을 제대로 산출해 낼 재간이 없었다는 얘기다.◆ 국제금융시장 급변 투기성 투자 발목하지만 그런 정도의 이유만으로 ‘자진 폐업’ 선언을 하기에는 이들 헤지펀드가 그동안 쌓아 온 업적이 너무나 거대했다. 소로스와 타이거 펀드는 그 이름만으로도 수많은 국제 투자자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거함이었다. 특히 지난 69년 설립된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 산하의 헤지펀드 회사들은 영국과 말레이시아 등 숱한 나라들을 경제 파탄 위기에까지 몰아넣는 공격적인 금융투기 전략을 구사, 세계적인 화제를 일으켜 왔다.소로스의 헤지펀드를 세계적인 ‘스타’로 주목받게 한 것은 지난 92년 영국을 최악의 경제 위기로 몰아넣었던 파운드화 투기 사건이었다. 소로스는 당시 영국의 통화관리가 느슨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 파운드화의 급락 가능성을 점치고는 1백억달러어치를 집중 매각하는 대공습을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소로스는 10억달러의 매각이익을 남기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대량 매도 공세에 밀린 영국 파운드화는 걷잡을 수 없이 폭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바닥을 모르는 파운드화의 하락 행진에 질겁을 한 국제 투자자들은 영국에 있던 자금을 앞다퉈 빼내기 시작했고, 영국 경제는 미증유의 외환 위기에 몰렸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선진국이었던 영국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받고 나서야 경제 파탄의 나락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이 사건 이후에도 소로스 펀드는 국제 금융시장에서의 금리 및 환율 편차를 이용한 이른바 ‘매크로(거시경제) 투기’를 틈만 나면 감행, 각국의 중앙은행 및 정책 당국으로부터 ‘공적 1호’ 취급을 받아왔다. 지난 97년말 태국을 시발로 아시아 경제가 ‘외환 위기 도미노’에 빠졌던 당시 말레이시아의 모하마드 마하티르 총리는 그 원흉으로 소로스를 지목, 국제적인 논란에 불을 당겼었다.소로스 펀드는 이처럼 화려한 편력을 거듭하면서 69년부터 지난해까지 31년 동안 연평균 32%의 투자 수익을 올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로버트슨의 타이거 펀드도 국제 통화와 금리, 주식의 흐름을 깊숙히 꿰뚫고는 대규모로 ‘판 돈’을 집어넣는 투기 방정식을 통해 지난 80년 설립된 이후 작년까지 연평균 25%의 수익을 올렸다.이처럼 세계 헤지펀드업계의 두 간판 주자는 어느모로 보나 한두번의 좌절로 인해 쉽사리 무너지기에는 너무나도 탄탄한 기반을 다져왔다. 그런 양대 펀드가 약속이나 한 듯 폐업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린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우선 지난 97~98년 중 아시아와 중남미, 러시아 등지를 파국 일보직전으로까지 몰아넣었던 국제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채권 및 통화 시장은 괄목할 만한 국제 공조체제를 통해 짜임새를 갖추게 됐다. 상당수 국가들이 과감히 통화 및 자본시장 자유화 조치를 취함에 따라 국제 환율 및 채권 시세가 이전에 비해 크게 안정돼가고 있다. 이는 헤지펀드로 하여금 활개를 치게 만드는 토양인 ‘비효율’의 여지를 대거 좁히는 결과로 이어졌다. 더구나 유럽 국가들이 공용 통화인 유로화를 개통시킴에 따라 헤지펀드들의 설 땅은 더욱 척박해졌다. 과거에는 유럽 주요국간의 환율 편차를 이용해 투기를 할 수 있었지만, 그럴 기회가 봉쇄돼버린 것이다. 이와 함께 세계적인 금리 안정 추세 역시 헤지펀드들의 발목을 죄는 결과가 됐다.이런 상황 변화로 ‘매크로 투기’의 기회가 줄어들면서 소로스 펀드 등 헤지펀드들은 주식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주식시장도 헤지펀드들에 그리 녹록한 투기 대상은 아니었다. 과거에는 헤지펀드들만이 동원할 수 있는 정보력을 통해 한발 앞선 투기가 가능했지만, 인터넷 혁명이 몰고 온 정보 민주화의 물결 앞에서 그런 약효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설상가상으로 소로스와 타이거 펀드의 목을 더욱 죈 것은 전문성으로 무장한 신예 헤지펀드들의 대거 출현이었다. 뉴욕의 실리콘 앨리와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 등 첨단 하이테크 지역을 중심으로 속속 등장하고 있는 신세대 헤지펀드들은 정보통신이나 생명공학 등 특정 업종에만 특화, 통화와 채권 주식 등 금융상품 전반을 대상으로 삼아 온 소로스 등 ‘제너럴리스트’ 펀드의 뒤통수를 치는 역할을 맡았다.◆ 헤지펀드 투자방정식 지각변동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두고 50억달러의 자금을 모집, 첨단 기술주식만을 투기 대상으로 삼아 영업하고 있는 보우만 캐피털 헤지펀드의 경우가 단적인 예다. 이 펀드는 정확한 분석력에 바탕을 둔 선별 투자를 통해 올들어 신경제 주식들의 급락 파고 속에서도 5%의 이익을 내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소로스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제너럴리스트’ 펀드들의 잇단 몰락에도 불구하고 헤지펀드 산업 자체는 시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이와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금융연구기관인 헤네시 그룹에 따르면 현재 헤지펀드에 맡겨져 있는 돈은 전세계적으로 2천2백21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5년전에 비해 7백60억달러가 늘어난 규모다.한마디로 소로스 등 ‘구시대’ 헤지펀드들이 명맥을 이어가기에는 시대가 확 바뀐 것이다. 철저한 전문성으로 무장하지 않고서, 국제 금융시장의 엉성한 틈을 노려 일확천금을 할 수 있었던 투기자본의 요순(堯舜) 시대는 지나갔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