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그룹 계열 한 정보통신관련 업체는 벌써 몇 개월째 직원주소록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뽑기만 하면 하루가 멀다하고 나가버리는 직원들 때문에 아예 주소록 만들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연말까지만 해도 한번 주소록을 만들면 적어도 1~3개월은 새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그러나 올들어 정보통신업계의 인력난이 가중된데다 IT관련 벤처업체들의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거의 한주에 한두명씩, 한달이면 절반 이상의 직원이 물갈이가 되는 바람에 매번 주소록을 만드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이다.대기업 직원 및 관료들의 벤처행은 사실상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올들어 인재확보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사정도 점차 악화되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정보통신 전문인력의 사관학교로 불리는 삼성전자는 급기야 자사 연구인력을 스카우트한 몇몇 벤처업체를 상대로 소송(전업금지가처분신청)까지 냈다. 드러난 이유는 ‘기업비밀을 누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른바 영업비밀 보호차원이다.속사정이야 어쨌든 이번 법정비화는 인재확보 ‘전쟁’이 빚어낸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이 관련 업계의 해석이다. 때문에 그동안 속만 끓여오던 대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은 삼성전자의 이번 법정소송이 벤처기업의 무차별적 스카우트 경쟁에 제동을 거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은근히 반기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기업비밀 누출’ 빌미 법정소송까지인력 스카우트 경쟁은 비단 대기업과 벤처기업 사이의 일만은 아니다. 벤처기업끼리, 또는 국내시장 확대에 불을 당긴 외국 인터넷관련 업체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공들여 뽑아 놓으면 채 한달도 지나지 않아 더 좋은 조건을 찾아 관련 업체로 옮겨가 버리는 직원들 때문에 요즘 벤처기업 사장들은 업무의 절반 이상을 인재채용 및 인력관리에 쏟고 있다. 신입사원에 대한 인사말도 “가능하면 오랫동안 함께 일합시다”가 주종을 이룬다.정보통신부가 집계한 1999년말 현재 국내 IT업계 인력은 1백8만명으로, 2004년까지 약 40만명의 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이 2005년까지 82만명(미국 노동부), 서유럽이 2002년까지 1백60만명(IDC)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정보통신 인력부족 현상은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이같은 인재난은 인터넷이 최근 몇년 사이에 급속도로 발달,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데다, 국내의 경우 특히 최근 1~2년 사이 인터넷 벤처기업 창업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인력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주된 요인이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지원자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쓸만한 사람’, 즉 해당분야의 인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구인난과 구직난이 공존하는 인력수급 불균형 현상도 심각하다.한별텔레콤과 계열사인 한별인터넷의 경우 올들어 두번에 걸쳐 공개채용을 실시했다. 각각 10여명이 필요한 자리에 두번 모두 1천대 1 이상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회사가 뽑은 인력은 5~6명에 불과했다. 한별텔레콤 여준영 홍보팀장은 “지원자는 많았지만 회사가 원하는 자격을 갖춘 인력은 많지 않았다”고 전한다.테헤란밸리에서 정보통신인력 중심의 헤드헌터로 유명한 드림서어치 권태균 이사는 “하루 정보통신 관련 구인의뢰가 10여건, 구직의뢰가 50여건씩 들어오지만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정보통신업계에서 요구하는 인력은 대개 3~4년 이상 실무경험이 있는 경력자인데 반해 구직자들은 해당업계 경력이 없거나 관련학원에서 해당업무를 익힌 초보자들인 탓이다.이 때문에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전문인력의 몸값은 그야말로 ‘부르는게 값’일 정도다. 인력시장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라고나 할까. 요즘에는 웹개발과 프로그래머 등 인터넷 관련 전문가들 외에도 특히 CDMA 등 무선통신 분야의 기술개발 인력의 몸값이 ‘상한가’다.따라서 이들 기술인력의 경우 보통 해당업계 평균임금보다 2배정도 많은 몸값을 요구한다. 권이사는 “심지어 연봉 3천만원을 받던 사람이 자신의 실제 몸값보다 훨씬 높은 1억원을 요구하는 ‘몸값 부풀리기’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고 전한다.여기에다 최근 코스닥시장 불안으로 스톡옵션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벤처업계에 또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잡는 것이 ‘사이닝 보너스’의 요구다. 프로야구선수처럼 연봉외에 별도의 입사계약금을 주는 방식으로, 대기업에서 벤처기업으로 옮길 경우 거의 당연시되고 있다. 사이닝 보너스의 수준은 연봉이 5천만원이면 5천만원 등으로 연봉과 같은 수준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이전 직장에서 빌려쓴 2억~3억원의 주택구입비 대납 등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직원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사재까지 터는 벤처업체 사장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감 폭주한 홍보·광고업계도 인재난인재확보 경쟁은 최근들어 정보통신업계의 호황으로 덩달아 일감이 폭주하고 있는 홍보·광고업계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현재 국내 홍보대행사는 80~90개에 달하고 있다. 이중 절반 이상이 1년도 채 안된 신생회사로 대부분이 벤처기업 홍보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G반도체와 LG산전 출신 홍보맨 4명이 지난해 10월 창업한 홍보대행사는 아예 이름부터 ‘벤처PR’이다. 정보통신전문 홍보대행업체로 자리를 잡은 드림커뮤니케이션의 경우 지난해 1월까지 10여개이던 고객업체(client)수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늘기 시작, 현재 34개에 이른다. 직원수도 12명에서 36명으로 늘었다. 이지선사장은 “요즘도 벤처업체들의 홍보의뢰가 끊이지 않지만, 인력과 업무 사이의 적정 수준을 유지하느라 홍보 물량을 전부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광고업계도 평균 30%의 인력이 교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터넷 업체들이 가장 눈독을 들인 마케팅인력이 바로 광고업계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코래드 박종선 PR담당 국장은 “올들어 연봉을 평균 20%이상 올린 광고업체들이 많고 유급휴가 확대, 우리사주 혜택, 스톡옵션 등 직원들에 대한 혜택을 늘리면서 벤처로 간 인력이 되돌아오는 U턴현상이 광고업계에서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최근의 이같은 전문인력 ‘몸값 폭등’ 현상은 사내 갈등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인터넷 업체인 M사의 경우 지난해 경력 1~2년차의 웹개발 및 마케팅 전문인력을 연봉 1천6백만원에 채용했다.그러나 올들어 같은 경력의 인력을 구하기 위해 적어도 2천2백만원을 줘야 했다. 외국기업에서라면 연봉은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도 감춰야 할 비밀중의 비밀이지만, 아직 그런 풍토가 익숙지 않은 국내 기업에서 같은 경력의 동료가 연봉 얼마를 받고 있는지 아는 것은 식은죽 먹기. 따라서 이로 인한 불협화음이 생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한 인터넷 업체는 최근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터넷 전문가를 직원으로 채용하면서 그 직원으로 하여금 상사가 될 대기업 출신 중역급 인사를 인터뷰하도록 했다. ‘인터넷 마인드’가 없는 상사와 일할 경우 곧 그만둘 것을 우려한 회사측의 배려에서였다.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입사 인터뷰. 기존의 전통 구경제 기업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 인재부족에 시달리는 인터넷 업체에선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현상이 ‘주류’는 아니라는게 벤처기업 관계자들의 입장. 한국벤처기업협회 고명섭 과장은 “노동시장도 수요와 공급이라는 자유시장원리에 따르는 만큼 희소가치(능력)에 따라 몸값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전제하고,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의 벤처기업 직원들이 대기업보다 낮은 월급과 열악한 근무조건에도 불구하고 미래가치를 보고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노동시장 유연성 선진화 증거한국경총 산하 연구소인 노동경제연구원 양병무 부원장도 “대기업과 벤처기업 사이의 활발한 인력이동은 그만큼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커지고 선진화되고 있다는 증거”라며 “이번 기회가 근로자들이 자신의 몸값에 대해 책임을 지고 진정한 ‘지식근로자’로 태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다만 “벤처기업으로 옮긴 대기업 출신들 중에는 연봉보다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기업문화 및 벤처정신을 갈망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만큼 대기업들도 최근의 인재 스카우트 경쟁을 보다 합리적인 인사관리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미국 실리콘 밸리 / 인터넷 벤처 메카도 ‘인재 확보’ 몸살정보통신(IT) 인력을 둘러싼 인재 확보경쟁은 비단 국내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인터넷 벤처의 메카로 불리는 미국 실리콘밸리도 마찬가지다.미국 정보기술협회(ITAA)는 최근 미국내 기업들이 향후 12개월내에 필요로 하는 IT관련 전문인력은 1백40만명에 달하는데 비해 적합한 인력은 수요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발표했다.CNN방송은 최근 이같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인재확보 경쟁을 ‘The war for talent’라는 타이틀로 소개했다. 우수한 인재의 채용은 성공적인 벤처창업은 물론 투자자금 확보의 필수요소라는 것이 이 보도의 핵심. 이 때문에 일부 벤처창업자들은 능력있는 CEO 채용을 위해 40만달러(1억4천여만원)의 연봉과 50%의 사이닝 보너스(입사계약금), 2백만달러의 대출서비스, 자동차와 운전기사, 가구가 딸린 아파트, 10%의 회사지분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기도 한다.그러나 결코 ‘돈’이 인재채용의 최우선 순위가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실리콘밸리 인재채용 전문가 에이미 버네티의 말을 인용한 CNN의 지적. 창업주의 기업마인드와 미래에 대한 비전, 일할 만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인재부족에 시달리는 미국기업이 새로운 수요에 대처하는 방법도 우리 벤처기업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ITAA가 미국내 7백개 벤처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대다수의 IT벤처기업들이 새로운 인력수요가 생겼을 경우 기존 인력을 투입하거나 다른 기업에서 인력을 스카우트하기 보다는 업무를 외부에 아웃소싱하거나 자체 직원교육을 통해 필요인력을 충당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한편 이같은 인력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의회에서는 외국 IT전문 기술인력의 미국내 취업을 확대하기 위해 취업비자 관련 규정을 완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내 대학에서도 단기 IT교육과정을 개설하는 등 전문인력 양성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