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쇼핑 정착, 중고품 매매 전년비 23% 증가 … 중고용품점도 동반 급팽창

“근검절약이 부자되는 지름길.” 웬만한 한국 사람이라면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을 법한 금언이다. 그렇다면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라는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중산층 정도만 돼도 널찍한 정원이 딸린 집에서 배기량 6기통짜리 승용차를 몰며, 주말이면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서 큰 쇼핑카트에 각종 상품을 가득히 채워 쇼핑을 하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국내에 범람하고 있는 할리우드산 영화나 각종 비디오물을 봐도 평균적인 미국인들의 삶은 대부분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모습일 뿐이다. 미국인들에게는 또 다른 단면이 있다. 수더분한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벼룩시장을 뒤져가며 중고품을 알뜰하게 재활용하는 모습이다. 동네 슈퍼마켓마다 마련돼 있는 게시판에는 온갖 중고품을 팔고 사려는 사람들의 광고가 가득 차 있기 일쑤다. 승용차에서부터 피아노, 가전제품, 의류, 운동용품 등 거의 모든 품목이 망라돼 있다.주말에는 많은 집들이 돌아가면서 ‘차고(garage) 세일’이라는 것을 한다. 이사를 앞두고 있거나, 집안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가구와 생활용품 등 쓰던 물건을 처분하려는 사람들이 집에 딸려 있는 차고와 앞마당에 이들 물건을 내놓고 이웃들에게 싸게 판매하는 행사다. 대부분의 차고 세일은 반나절이면 내놓은 물건이 동날 정도로 마을 사람들의 알뜰 쇼핑 대상으로 활용된다.중고용품을 경매 방식으로 팔고 사게끔 중개해주는 세계 최초의 인터넷 회사, 이베이(e-Bay)가 미국에서 태동해 선풍적인 인기리에 성업중이라는 사실도 미국인들의 구매 성향을 엿보게 하는 단면이다. 이렇듯 ‘근검’을 추구하는 미국인들의 생활 패턴은 미국 경제가 사상 최고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는 요즘에도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바뀌기는 커녕 알뜰 쇼핑이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자동차를 비롯해 컴퓨터, 패션의류, 냉장고 등 갖가지 중고제품을 판매하는 점포들이 미국 곳곳에서 급속히 팽창하고 있다.◆ 백화점 못지 않은 매출 신장세미국의 연방 센서스국에 따르면 미국내의 중고용품 매매 규모는 지난해 1백70억달러로 전년보다 23%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97년에는 1백30억달러였다. 센서스국은 고가에 거래되는 고가구와 도자기 등 골동품류는 통계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말하자면 ‘순수’ 중고용품만으로도 이렇게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신품 시장과 비교하면 중고용품 시장 규모는 아직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작년의 경우 미국내에서 판매된 의류, 생활용품, 가구 가운데 중고제품 비중은 2% 남짓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요즘이 어떤 때인가. 상당수 소비자들이 미국 경제의 유례없는 호황에 힘입어 신품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정도로 생활에 여유가 생긴 것이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이 되레 중고품 구매를 늘리고 있으니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중고용품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관련 업계에도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다. 전국 단위로 점포망을 관장하는 중고용품 체인회사가 등장했는가 하면, 중산층 이상의 부유한 사람들이 몰려사는 대도시 근교에도 이들 중고용품 매장이 속속 설립되고 있다. 이들 점포는 ‘중고품 매장은 칙칙하고 싸구려 같은 곳’이라는 일반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각종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매장에 화려한 조명을 설치하고, 중고의류를 구매할지 결정하기 전에 입어볼 수 있게끔 탈의실을 깔끔하게 꾸미며, 고객들로 하여금 쇼핑과 함께 휴식도 취할 수 있도록 매장 한켠에 커피 바를 운영하는 등의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중고용품 판매업계에서 이런 류의 혁신 바람을 앞서 일으키고 있는 선두주자는 그로우 비즈 인터내셔널이라는 중고품점 체인 회사다. 이 회사는 전국의 가맹점들에 물품 진열 요령에서부터 대 고객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매뉴얼을 제정해 지키도록 하고 있다. 매뉴얼은 반품 처리 등 세세한 부문까지 다루고 있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6억5천만달러. 웬만한 백화점에 못지 않은 외형이다.중고용품점들이 이처럼 성업을 누리게 된 데는 기존 백화점들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고 유통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메이시, 월마트, 시어즈 로벅 등 대중 백화점들이 최근 십수년 동안 사활을 건 마켓 셰어 경쟁을 벌이면서 무한에 가까운 할인 판매 경쟁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소비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싼 값에 물건을 사기 위해 백화점별로 가격을 비교하는 것이 체질화되다시피 했다. 지난 10여년 사이에 타깃, K마트 등 할인 양판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도 그런 풍토의 산물이었다.그러는 사이에 많은 미국인들에게 ‘알뜰한 쇼핑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쇼핑’이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됐다. 지난해 <중고품 쇼핑의 멋(Secondhand Chic) designtimesp=19748>이라는 저서를 낸 유통전문가 크리스타 와일은 책에서 “최근 5년 정도의 사이에 중고품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자세가 확연하게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주위의 이목을 살펴가며 몰래 중고품을 사곤 했는데, 요즘은 좋은 중고품을 값싸게 샀다는 것이 공공연한 자랑거리로 바뀌었다”는 증언이다. 그녀가 중고품만을 골라 산다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 비웃었던 친구가, 정작 자신의 결혼식 때가 되자 스스럼없이 중고 웨딩드레스를 구입하더라는 일화도 곁들이고 있다.많은 미국인들 사이에 “새것이로되 싸구려만 파는 상설 할인매장보다는 중고품점이 훨씬 더 실속이 있다”는 인식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중고품점에서는 잘만 하면 새것과 별로 다를바 없는 고급 중고품을, 거저나 다름없는 싼값에 살 수 있다는 매력에 많은 미국인들이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최근 미국 경제가 구가하고 있는 공전의 장기 호황에 따라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스톡 옵션이나 주식 투자 등으로 졸지에 큰 돈을 쥐게 된 사람들이 멀쩡한 소파를 바꾸고, 한참 쓸만한 고급 의류 등을 새것으로 바꾸기 위해 중고품 시장에 내놓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기 때문이다. 테니스 라켓을 비롯한 운동용품도 잘만 찾으면 ‘새것 같은 중고품’을 얼마든지 싸게 구입할 수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미국내 부유층 가운데에는 고급품을 샀다가 쉽게 싫증을 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캘리포니아주 등지의 부촌 일대에서는 벚나무로 만든 고급 보석 수집함 등이 포장 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채 중고품으로 전락, 유통되고 있을 정도다.◆ 음반시장서도 중고품 구매 선풍미국에서 중고품 시장이 활황을 누리고 있는데는 하이테크 제품의 급속한 세대 교체도 단단히 한몫을 거들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컴퓨터와 정보통신 기기 등의 분야에서는 한달이 멀다하고 첨단 기능이 추가된 신제품이 출시되는 바람에, 멀쩡한 것들이 졸지에 ‘퇴물’로 전락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고품 시장에 쏟아져나오는 컴퓨터만도 연간 50억달러 어치가 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하이테크의 눈부신 진전은 음반 시장에서도 중고품 선풍을 일으키는 것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음질 콤팩트 디스크(CD)의 수명이 길어짐에 따라 상당수 CD가 중고품으로 거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음반 시장을 겨냥해 설립된 중고품 판매 전문회사인 CD 웨어하우스사는 현재 미국 전역에 걸쳐 3백60개의 체인점포를 거느릴 정도로 성업을 누리고 있다.뭐니뭐니 해도 중고품 비즈니스계에서 일고 있는 변화 가운데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중고품점들의 ‘이미지 쇄신’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중고품점들이 웬만한 할인 양판점을 웃도는 인기를 누리면서 점포를 백화점 못지 않게 산뜻한 모습으로 단장하는게 유행을 이루고 있다. 중고품점 체인 회사인 굿윌 인더스트리즈사의 경우 매장 내에 커피 숍을 설치하기 시작했는가 하면, 중고 도서 코너의 한쪽에는 고객들이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게끔 푹신한 소파들을 배치해 인기를 모으고 있다.‘새것같은 중고제품’---. 괜한 허울보다는 알맹이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의 ‘실속 혁명’이 미국 유통업계에 일대 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