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도 영어를 제2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의견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얼마전부터 우리나라에도 국제화와 세계화의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우리 언어 생활에서 영어나 기타 외래어들을 섞어 사용하는 현상들이 일반화되고 있다. 하지만 엄연히 ‘외국어’인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주장에는 무리가 따른다.적어도 한 언어가 사회에서 공용어로서의 역할을 하려면 그 사회에서 언어로서의 기능을 옳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사회 구성원들의 상당수가 그 언어를 구사하고 수용하는데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그러나 한국 내에는 영어를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 사용자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 이점이 언어의 정의와 사회적 기능이란 면에 비추어 볼 때 영어 공용화론 반대의 핵심적 이유이다. 기본적으로 구성원간의 의사 소통 수단으로서 언어가 존재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파생되는 정보 기능, 표현 기능, 친교 기능들을 영어라는 ‘외국어’는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 것이다.이미 다른 언어를 공용화시켜 사용하고 있는 다언어 국가들의 형편을 봐도 한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영어 공용화 주장은 찬성하기 어렵다.영어를 공용화한 인도나, 스페인어를 공용화한 파라과이 등과 같은 다언어 국가들은 모두 자의적으로 일부러 다언어 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정책이나 이민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두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경우이다.이 두 국가들은 모두 다언어 때문에 극심한 문제점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인도의 경우, 언어 교육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으며 파라과이도 스페인어에 대한 선망 및 우월 의식이 국민간 위화감을 조성해 국민간의 화합을 저해하고 있다.그런데 한국어라는 한가지 언어만으로도 충분히 의사 소통이 가능하고 훌륭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를 공용어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가 아닐 수 없다. 다언어 국가들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뻔히 보면서 굳이 다언어 국가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물론 영어 공용화론이 나오게 된 이유와 배경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영어 사용국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은 적이 없고, 한때 미국을 최대의 우방국으로 여긴 경험까지 있는 만큼 영어에 대한 거부감 대신 선망과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영어 공용화론을 주장함에 있어서 잠재적인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또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미국 및 기타 영어 사용 국가가 강력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고 영어가 국제어로 통용되는 현상황에서 영어 공용화론은 언뜻 생각하면 쉽게 공감이 간다.그러나 이런 국제 사회의 상황을 고려할지라도, 영어를 제2 공용어로 삼기까지 하자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영어를 공용화한다고 해도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언어로서의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정착되기까지는 몇십년, 길게는 몇백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 또 국제 사회의 흐름과 판도가 바뀔 것은 확실한데 미국이 앞으로도 여전히 현재와 같은 세계 대국으로서의 위상과 영향력을 지닐지도 의문이다.언어는 단순한 말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그 사회 구성원들의 혼이며 구심점 역할을 한다. 선각자 박은식 선생은 “일본말을 가르치면 일본 사람이 되고, 중국말을 가르치면 중국 사람이 되므로, 우리는 우리말을 가르쳐야 한다”고 일깨워 왔다.또한 프랑스의 부모들은 딸을 시집 보낼 때, “내 딸에게 프랑스 말만은 잘 가르쳤다”고 자랑한다고 한다. 프랑스 말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올바른 프랑스 정신을 가진 참된 프랑스인으로 길렀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세계어로서의 영어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고 국제 사회에서 영어가 가진 힘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영어의 중요성을 알고 열심히 배우되 어디까지나 ‘외국어’로서, ‘필요에 의해’ 배우는 언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내에서 언어의 기능을 올바르게 수행하지도 못할 영어를 공용화해 많은 문제점을 자청할 필요는 없다.나아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구심점이 되어온 한국어의 위상을 조금이라도 떨어뜨려 구성원들에게 혼란을 줄 이유도 없다. 이렇게 볼 때 굳이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는 식의 감정적인 이유를 대지 않더라도, 영어 공용화론이 지닌 폐단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