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둔 친척 여동생이 집에 놀러 왔다. 무슨 얘기 끝에 “오빠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얘기를 한다. 친오빠는 아니지만 나도 오빠에 해당되고 친오빠도 둘이나 되어서 어느 오빠를 가리키는지 헷갈려 물어보니 결혼할 자기 신랑 얘기다. 순간 기가 막혔다. 친척 중에도 오빠가 여럿인데 왜 신랑될 사람까지 오빠로 불러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갓 결혼한 여직원과 얘기하면서 요즘에는 누구나 그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와같은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호칭도 고쳐야 할 문제지만 직장 내에서의 잘못된 호칭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학교의 선후배 사이라도 직장 내에서는 공적인 호칭을 사용해야 하는데 만나자마자 생년월일 확인 절차에 따라 언니 동생이 되고 만다.개인적인 관계의 호칭이야 가족간의 문제지만 회사 내에서의 잘못된 호칭은 회사의 전체 분위기까지 흐려놓게 된다. 심지어 라디오나 텔레비전 같은 매스컴에서조차 사회자를 보고 언니니 오빠니 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서세원 오빠 어쩌구 이금희 언니 저쩌구….그런데 이런 일이 언니, 오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음식점 혹은 술집에서는 남자는 삼촌, 여자는 이모로 부르는 일이 흔하다. 이미 아줌마, 아저씨가 전국적인 호칭이 된지 오래됐으니 그야말로 전국민의 가족화다. 단군의 후예니까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 사이에도 조금만 가까워지면 형님, 아우하는 사태에 이르면 가히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아이들의 학부모 모임에 다녀온 아내는 호칭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라고 한다. 처음 모임을 만들었을 때는 모두 누구 엄마였던 호칭이 횟수가 늘어나고 친해지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언니, 형님 등의 호칭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매개로 이루어진 모임에서 단지 나이가 한두살 위라는 이유만으로 왜 형님 혹은 언니로 불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아내는 곤혹스러워한다.호칭은 무의식적으로 사고에 영향을 끼친다. 언니나 형님으로 부르면 부르는 사람이나 그렇게 불리는 사람은 거기에 걸맞는 기대와 행동을 하게 되어 있고 기대와 다른 행동을 하면 섭섭함이 생겨 오히려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형님이라는 호칭을 들으면 형님 호칭에 걸맞게 밥이라도 한번 더 사야 하고 형님의 말씀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속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호칭만 형님이면 그것은 결국 모두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전국민의 가족화가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사람을 나누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형님이나 언니라는 울타리를 치고 울타리 안의 사람과 울타리 밖의 사람을 엄격히 구분해서 대한다는 것이다.즉, 울타리 안은 다 친척이고 이웃이고 울타리 밖은 나와 별 상관이 없는 남이라고 여긴다. 안의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친절하지만 밖의 사람에겐 나 몰라라 하며 조금의 배려도 하지 않고 막 대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동네가 작고 친척끼리 모여 살 때는 별 문제가 안되지만 지금처럼 복잡한 사회에선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다.아는 사람에겐 엄청 잘하고 모르는 사람에겐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보다는, 딱 중간 정도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는 것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