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미디어 등 MCA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반해 전격 인수 … 합병시너지 효과 ‘두고 봐야’

“할리우드의 자존심이 이번에는 프랑스에 팔려나갔다.” 무명의 프랑스 수돗물 회사인 비방디(Vivendi SA)사가 주류(酒類) 및 영화, 음반 복합 그룹인 캐나다의 씨그램사를 통째로 인수한다는 지난주의 전격적인 뉴스로 할리우드가 또 한번 요동치고 있다. 본업인 수돗물 비즈니스로부터 인터넷을 필두로 한 정보통신 분야로의 사업 다각화를 꾀하고 있는 비방디사가 북미의 간판 기업그룹 중 하나인 전통의 씨그램사를 약 3백40억달러에 인수키로 했다는 소식은 할리우드는 물론 미국 경제계 전반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빅 뉴스였다.씨그램사는 본사를 캐나다의 몬트리올에 두고 있지만, 미국의 간판 영화·오락회사인 MCA사와 음반업체인 폴리그램 레코즈사 등을 산하에 거느리고 있는데다 캐나다가 사실상 미국 경제·문화의 영향권에 있다는 점 때문에 ‘범 미국기업’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씨그램은 지난 90년 일본의 마쓰시타전기에 넘어갔던 MCA를 95년에 재인수, 보수적인 미국인들로부터 “북미의 체면을 살렸다”는 성원을 받아온 터였다.80년대 말과 90년대 초는 일본 기업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엔고의 위력을 등에 업고 미국 각 분야의 간판 기업들을 닥치는대로 인수, 국수주의적인 미국인들 사이에 ‘황화론(黃禍論)’이 들끓던 시기였다. 당시 일본 전자회사인 소니그룹이 콜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한데 이어 마쓰시타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MCA를 사들이면서 “할리우드가 일본 사무라이들에게 접수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가 하면 일본 부동산 투자회사인 미쓰비시지쇼가 비슷한 시기에 미국 문화의 자존심인 뉴욕의 록펠러 센터를 매입, 미국 타임지로부터 ‘미국의 혼이 팔렸다’라는 표제 기사로 공격받았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미국인들로서는 이중 천신만고 끝에 ‘북미 기업’의 손으로 되돌아왔던 MCA가 이번에는 미국의 ‘문화 라이벌’ 프랑스 기업에 넘어가게 됐으니 달가울리가 없다. 그러나 비방디의 씨그램사 합병에 대해 미국인들은 과거 마쓰시타의 MCA 인수 당시보다 훨씬 담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본과 달리 프랑스는 미국과 인종·문화적 뿌리가 비슷하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10년간 ‘글로벌화’가 그만큼 깊숙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MCA, 10년동안 오너 국적 네번 교체이런 점에서 지난 1925년 시카고의 안과 의사 줄 스타인에 의해 ‘뮤직 코퍼레이션 오브 아메리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MCA의 ‘유전(流轉)’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창립후 65년 동안 별다른 풍운을 타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듯했던 MCA가 지난 10년 동안 ‘미국→일본→캐나다→프랑스’로 네번씩이나 오너의 국적을 갈아치우게 됐다. 미국의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인 MCA가 이처럼 각국 기업들의 주요 M&A(합병 및 인수) 표적이 된 것은 이 회사의 비즈니스 구조가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글로벌 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영화와 음악, 미디어 등 종합적인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MCA가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MCA를 거느린 씨그램이 경영난에 봉착한 것으로 알려진 몇년전부터 주요 기업들 사이에 이 회사를 통째로 사들이려는 경쟁이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돼 왔다. 정보통신의 ‘신(新)경제’ 비즈니스에 진출하려는 ‘구(舊)경제’ 기업들에 MCA의 사업구조는 더없이 매력적이었던 것이다.비방디사의 씨그램사 인수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단행됐다. 연간 매출 4백억달러 규모의 비방디사는 ‘신·구경제’가 혼재하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매출의 절반은 본래 업종인 수돗물 공급과 폐기물 처리, 건설 산업에서 챙기고 나머지 절반을 정보통신 및 대중오락 비즈니스에서 채우고 있다. 최근들어 비방디사는 사업 비중을 ‘신경제’ 쪽에 더욱 쏠리게 하는 전략을 추구해 왔다. 영국 위성방송 회사인 브리티시 스카이 브로드캐스팅사의 지분 24.5%를 매입한 것을 비롯해 프랑스 2위의 무선전화 회사인 세게텔사(지분율 59%)를 산하에 두고 있다. 43세의 젊은 경영인 장 마리 메시에르 회장이 이끄는 비방디사는 최근 출판·광고 회사인 아바스사를 인수한데 이어 유료 케이블TV 회사인 카날사의 지분 49%를 확보하고 있다. 또 유럽 전역을 커버하는 인터넷 포털 업체인 비바치사도 거느리고 있다.◆ 씨그램 원조 알코올 비즈니스는 도태비방디사는 이처럼 유럽 지역에서 ‘신경제 비즈니스’의 주도권을 거머쥐는데 유리한 업종에 대부분 진출해 있는 상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빠진 한가지가 바로 ‘콘텐츠 비즈니스’다. 그 콘텐츠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다름아닌 MCA의 비즈니스였다. 여기에 씨그램 산하의 자매 회사인 음반업체 폴리그램 레코즈 등까지 덤으로 얹혀진다니 비방디사로서는 ‘금상첨화’였다. 비방디사는 유럽 전역을 꿰뚫고 있는 자신들의 판매 네트워크에 MCA의 콘텐츠가 결합될 경우 유럽의 신경제 시장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재빨리 해낸 것이다.MCA를 거느린 씨그램사로서도 비방디와의 결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지적된다. 업종간 결합에 의한 대형화 및 이를 통한 시너지 효과의 극대화가 신경제 비즈니스의 국제적 키워드가 된 마당에 언제까지나 콘텐츠 산업에 안주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콘텐츠 분야의 라이벌인 타임 워너사가 네트워크 업계의 아메리카 온라인(AOL)사와 전격적으로 합치고, 종합 엔터테인먼트 업체인 월트 디즈니그룹과 ABC 방송사가 합병하고, 통신회사 바이아콤과 영화회사 패러마운트가 결합하는 등의 업계 추세는 씨그램으로 하여금 결단을 재촉하는 촉매제가 됐다.업계에서는 바로 이 점에 주목, 비방디와 씨그램의 결합이 두 회사 모두에 사운(社運)을 건 대도박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를 둘러싼 경쟁 환경이 급변하고 있어 합병 이후의 새 출발이 조금이라도 삐걱거렸다가는 ‘않느니만 못한’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사례를 보더라도 비방디-씨그램의 합병과 비슷한 업종간 결합을 단행했던 다른 기업들 중 상당수가 한동안 경영 안정을 찾지 못한채 고전했던 경우가 수두룩하다. 비근한 예로 미디어 업체 타임사와 영화·오락기업 워너사의 합병으로 지난 89년 새출발했던 타임워너그룹은 지난 98년까지의 9년 동안 우량기업 주가 평균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S&P) 500 지수에 줄곧 못미치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이에 대해 메시에르 비방디사 회장은 “라이벌 회사들의 합병 후유증 전철을 답습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장담한다. 비방디의 강점인 인터넷 네트워크 등 미디어 망을 통해 씨그램사의 영화 및 음악 상품을 판매하는 등 이번 합병을 통해 ‘새로운 매출 모델’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호언이다. 메시에르 회장은 합병 시너지 효과를 가능한 한 최단 기간내에 극대화하기 위해 ‘미래 수익구조에 도움이 안되는’ 구경제 비즈니스는 상당 부분을 털어버린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씨그램사의 모체인 주류 사업부문을 따로 떼어내 매각하거나 정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씨그램의 원조인 알코올 비즈니스가 이번 합병을 통해 도태된다는 뉴스는 월가 분석가들에게 또 다른 연구 테마를 안겨주고 있다. 지난 28년 캐나다의 사업가 사무엘 브론프만이 씨그램을 인수한 뒤 3대에 걸쳐 확장돼 온 주류 부문이 ‘브론프만 제국’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족벌 경영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아온 씨그램사는 바로 그 때문에 지금과 같은 비운을 맞이했다는 것이 분석가들의 진단이다. 씨그램 그룹의 3대 총수인 에드가 브론프만 2세 회장은 씨그램을 케케묵은 주류 회사로부터 강력한 미디어 복합그룹으로 변신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새로운 분야에 대한 안목의 부족으로 경쟁력있는 경영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는 그가 씨그램의 총수로 취임한 지난 94년 6월 이후 현재까지 씨그램의 주가가 고작 두배 오른 것에 불과하다는데서 잘 드러난다.그러나 에드가 브론프만 2세 회장은 이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보다 경쟁력있는 파트너를 찾아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정면 승부수를 띄웠다는 점에서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 에드가 2세는 비방디와의 합병으로 새롭게 출범할 ‘비방디 유니버설’사의 음악 및 인터넷 사업 담당 부회장에 취임, 메시에르 회장의 밑에서 일하기로 했다. 뉴욕 타임즈는 에드가 2세의 이런 결단을 보도하면서 “그가 내린 선택은 훗날 위대한 결단으로 평가받을지도 모른다”고 후한 점수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