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0일. 현대자동차는 새로운 스타일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싼타페를 발표했다. ‘퓨전카(fusion car)’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며칠 뒤 삼성전자와 LG전자에서도 각각 새로운 제품을 발표했다. 삼성전자에서는 휴대폰에 디지털카메라의 기능을 합친 ‘애니콜 카메라폰’을, LG전자에서는 MP3플레이어 PC카메라 디지털스틸카메라 등의 기능을 한곳에 모은 ‘디지털 뮤직아이’라는 신제품을 선보인 것이다. 모두 퓨전제품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이보다 앞선 지난 4월에는 야후코리아와 삼성화재가 손잡고 퓨전마케팅온라인(FMO)을 펼치기도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온라인업체가 오프라인업체를 대신해 일련의 마케팅을 전개하는 것이다.90년대말 음식 패스트푸드 음악 등을 중심으로 주목받았던 퓨전이라는 접두어가 경계를 넓히며 다시 관심권으로 들어온 것이다.그렇다면 이처럼 영역을 가리지 않고 붙어다니는 아이콘이 된 퓨전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간단하다. ‘이질적인 것들의 뒤섞임, 혼합, 융합’이라는 뜻이다.그러나 지금의 퓨전열기는 단순히 믹스에 그치지 않는다. 온·오프라인간 벽을 넘나드는가 하면, 제품 또는 기능간 경계의 벽을 사정없이 허물어버린다. 그래서 퓨전은 해체와 파괴, 탈장르, 재창조까지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신한종합연구소 문화실 박영배팀장은 “차원 성격이 다른 것을 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 또는 장르를 합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퓨전”이라고 설명했다.이러한 퓨전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양자택일(either/or)의 사회가 아닌 다종선택(multiple option)의 사회에서 다양한 개성과 복합적인 감수성을 지닌 소비자들이 생산물을 결정하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현상으로 풀이하고 있다. 신한종합연구소 박팀장은 “퓨전을 시장정체 등의 벽을 허물기 위한 새로운 마케팅 돌파구로 활용하거나, 하이브리드문화 즉 잡탕문화인 디지털문화를 상품 생활 등에 반영하는 산물로 생겨났다”고 설명하고 있다.퓨전이 등장한 것은 지난 60년대말 미국에서 재즈에 전자음악을 접목한 퓨전재즈를 선보이면서. 국내에서는 80년대 중반 듀엣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자신의 음악을 퓨전재즈라고 설명하면서 처음 대중에게 퓨전이라는 말이 소개됐다. 그후에도 많은 가수들이 퓨전재즈를 들고 무대에 섰으며, 최근에는 록과 클래식, 록과 트로트, 록과 재즈 등을 섞은 창법이나 노래들이 등장했다.◆ 확산일로 퓨전열기 '울타리가 없다'이처럼 음악에 한정됐던 퓨전이 보다 광범위하게 퍼진 것은 지난 98년 강남 청담동 일대에 퓨전레스토랑들이 들어서면서. 80년대 중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퓨전퀴진(요리), 퓨전레스토랑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미국유학파들을 중심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처음에는 국적도 없는 정체불명의 음식이라는 평이 나오기도 했지만, ‘퓨전벨트’라는 거리까지 형성될 정도로 이들의 인기는 높았다. 정통요리만을 고집하던 호텔 레스토랑들도 퓨전요리를 앞다퉈 내놓는 일까지 빚어지기도 했다.레스토랑에 이어 퓨전 바람을 탄 것은 외식·식품업계. 패스트푸드업계에서는 김치 쌀밥 불고기 등 전통음식을 이용한 다양한 패스트푸드를 잇달아 선보였다.먹거리에 이어 패션에서 퓨전바람이 불었다. 클래식과 캐주얼을 합친 퓨전패션이 선보이는가 하면, 패션테마를 퓨전에 맞추고 다양한 마케팅을 전개하는 업체도 등장했다.대중문화의 반사경인 텔레비전도 퓨전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오락과 정보를 담은 인포테인먼트(SBS ‘호기심천국’), 교육과 오락요소를 함께 버무린 에듀테인먼트(SBS ‘머리가 좋아지는 TV’),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섞은 다큐드라마(MBC ‘성공시대’) 등의 새로운 장르의 프로그램들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최근에는 퓨전열기가 정보통신 가전 등으로 옮겨왔다. 예전에 복합기능의 가전제품들이 잠시 반짝인기를 모았다가 사라진 예가 있지만 퓨전제품을 내놓는 업체들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다.범용제품의 판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N세대나 신세대주부들을 대상으로 충분히 판매시장이 형성돼 있다는 판단에서다. 내구재인 자동차에도 퓨전바람이 불어 승용이면 승용, 트럭이면 트럭 하고 떠오르는 이미지는 퓨전이라는 이름 아래 여지없이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이밖에도 동서양간의 육아방법을 혼합한 퓨전육아, 동서양의 인테리어소품이나 디자인을 뒤섞은 퓨전인테리어, 퓨전레포츠, 퓨전영화, 퓨전매니지먼트 등 퓨전의 응용범위는 계속 확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퓨전열기, 일시적 vs 롱런 의견분분이처럼 제품이나 기업경영 등에 퓨전열기가 불어도 궁금증이 없을 수 없다. 바로 퓨전열기가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사회·문화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트렌드로 롱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퓨전이 디지털 네트워크시대의 기술발전이나 무경계사회화, N세대의 트렌드 등을 반영하는 하나의 큰 흐름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롱런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삼성경제연구소 김휴종연구원은 “퓨전은 하나의 분명한 트렌드”라면서 “가전 자동차 등에 디지털기술이 접목되면서 소비자들의 편의성을 제고하기 위한 접점을 찾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제일기획 전략마케팅연구소 김익태국장은 “기술배경을 가진 분야의 퓨전은 롱런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음식 패션 등 단순히 합친다는 식의 퓨전은 그렇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퓨전현상을 문화적인 또는 N세대라는 제한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보다는 기업경영에 있어 시장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경쟁자보다 한발 먼저 감지하고 액션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며 퓨전도 그렇게 응용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 김국장의 덧붙인 말이다.이러한 낙관적인 견해와 달리 건국대 경영·경영정보학부 송균석교수는 “21세기를 퓨전문화가 지배할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면서도 “음식 패션 등 문화적인 부분에서의 퓨전은 지속되겠지만 가전 자동차 등 산업분야에서의 퓨전은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며 상반되는 견해를 보였다.그러나 이러한 트렌드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기업경영자나 상품기획자, 마케팅담당자 등에게 있어 신규시장 진입이나 시장지배력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는 하나의 기회이며, 이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송교수가 덧붙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