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 여성과 남성, 소재까지 융합 ‘신선한 충격’… 퓨전 테마 패션쇼도 인기

졸업을 앞둔 여대생 김희정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스포티 공주’로 통한다. 운동을 잘 해서, ‘공주병’에 걸려서도 아니다. 다름 아닌 옷차림 때문이다. 김씨는 레이스가 달린 하얀 드레스에 미국 메이저리그 유명구단의 로고가 박힌 점퍼형 야구 티를 입고 다닌다. 신발도 샌들이나 구두가 아닌 밑창이 두터운 운동화다. 다소 파격적이기는 하지만 홍대 앞이나 압구정동 거리에서 김씨 같은 여학생들을 보는게 그리 어렵지 않다. 이것이 ‘로맨틱 스포츠룩’이라 불리는 옷차림이다.테헤란 밸리에서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정사장에겐 최근 고민이 하나 있었다. 창업 당시에 즐겨 입던 청바지와 면티셔츠를 사장이 됐다고 하루아침에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회사를 대표해 손님도 맞아야 하고 모임에도 참석해야 하는데 캐주얼 복장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얼마 전 생일에 직원들이 선물한 옷이 이런 고민을 풀어줬다. 이 옷은 얼핏 보면 정장같은데 모자가 달린 ‘퓨전 정장’이다. 소매도 걷어올려 붙일 수 있다. 양복바지도 단이 나풀거리지 않게 좁게 돼 있다. 기존의 세미정장이나 캐주얼 정장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이다.◆ 한복에 유럽풍 가미 패션도 등장패션시장에 본격적으로 불어닥치고 있는 ‘퓨전’ 바람의 일면들이다. 이처럼 분위기가 서로 다른 옷들을 섞어 입는 퓨전패션은 예전에도 있었다. “예전의 퓨전이 부조화를 통한 반항과 해체를 표방했다면 요즘에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성이 돋보인다”는게 배천범 이화여대 디자인학부 교수의 말이다. 그 예로 올 여름 패션컨셉을 퓨전으로 잡은 ‘SJ’, ‘롤롤’, ‘도니라이크’, ‘INVU’ 등 10대 후반에서 20대 여성을 겨냥한 여성복 브랜드들을 들 수 있다.퓨전을 테마로 한 패션쇼도 인기다. 지난 4월 영캐주얼 의류업체 (주)신원이 진행한 ‘퓨전패션쇼’가 그것이다. 이 회사의 브랜드 ‘베스띠벨리’의 전속모델인 탤런트 김희선씨가 퓨전패션쇼에서 뽐낸 옷들은 국적이 분명치 않다. 티셔츠에 일본 기모노가 그려져 있거나 중국전통 자수, 인도의 사리 등이 디자인돼 있다. 동양적 요소가 서양식 현대 의상과 접목된 것이다. 패션디자이너 이영희씨는 한복을 이용해 한국적인 것과 유럽풍을 섞은 오뜨꾸띄르 콜렉션이라는 퓨전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zen’이라는 동양의 신개념을 도입한 디자인이 유행했다. 그야말로 ‘동 ·서양의 만남’이다.한 시대를 풍미했던 패션 트렌드간의 접목이 가미된 것도 요즘 선보이는 퓨전 패션의 또다른 양식이다. 서울 강남 청담동에 있는 박윤수 올스타일의 박윤수 사장은 “올 가을에도 여름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패션 사조가 혼합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사장이 디자인한 옷들의 형태는 70~80년대 서양복식을 따르고 있다.그러나 색상만큼은 한국적이다. 전통 한복치마나 색동 저고리에서나 볼 수 있는 원색들을 현대 의상에 재현한 것이다. “아방가르드, 미니멀리즘, 로맨티시즘, 코리아리즘 등이 뒤섞인 새로운 퓨전트렌드들이 계속 만들어 질 것”이라고 박사장은 내다봤다.유행에 민감한 여성복 외에 유니섹스 캐주얼에도 퓨전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전혀 다른 색채가 혼합되거나 정적인 디자인에 스포츠 이미지가 공유되기도 한다. 캐릭터에 실용성을 가미한 크로스 코디다. 앤스튜디오의 ‘갤러리 퍼퓸’의 경우 심플한 캐주얼의 기본 컨셉에 힙합과 포지티브한 스포츠 라인을 활용했다. 대현의 ‘Wild but Mild’를 표방한 ‘스푼’은 이지캐주얼의 편안함과 스포츠웨어의 기능성을 이중적으로 선보인 대표적 퓨전브랜드다.(주)성도의 영캐주얼 브랜드 ‘톰보이’의 이승용 MD는 “색상뿐 아니라 이질적인 옷의 소재들도 퓨전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시각성에서는 실크류를, 실용성에서는 면 소재를 가미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여성성과 남성성을 결합, 성이라는 벽을 허무는 퓨전패션도 선보이고 있다. 여성정장 브랜드 ‘오브제’의 경우 거친 느낌이 나는 데님 소재와 여성스러운 비즈장식 소재를 섞은 정장을 선보였다. “남성복에 어울리는 데님 소재를 로맨틱한 실루엣의 원피스로 표현한 데님 시리즈가 반응이 좋았다”는게 오브제 김민기 팀장의 설명이다.옷의 소재나 트렌드뿐만 아니라 브랜드네임과 패션쇼장까지도 퓨전화되는 추세이며, 최근엔 패션과 하이테크의 접목도 시도됐다. 전자상거래업체 이지클럽의 캐주얼 브랜드 카이스트(KAIST) 런칭쇼가 대표적이다. 하버드나 스탠퍼드, MIT처럼 외국 유명 대학의 경우 대학 이름을 브랜드로 상품을 개발, 시판하는 사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지난 5월 코엑스에서 열린 수입자동차 모터쇼의 포드 자동차 부스에서는 디자이너 우영미씨의 ‘솔리드 옴므’ 패션쇼가 열려 관심을 모았다. 모터쇼와 패션쇼가 결합한 행사다. 인터넷방송국 SDN은 개국기념 행사로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연출한 퓨전패션쇼를 선보였다. 패션과 뮤지컬, 패션과 요리를 접목시킨 퍼포먼스 등도 나왔다.퓨전패션이 유행함에 따라 퓨전 메이크업도 관심을 끌고 있다. 신단주 메이크업 아카데미의 신단주 원장은 “동양적인 미, 서구적인 미를 동시에 연출하기 위해 전통적인 화장법과 현대식 메이크업을 적절히 조화하는 방법들이 많이 사용된다”고 말했다.◆ 수출시장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도이처럼 패션영역에서 전방위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퓨전붐은 패션산업이란 측면에서 보면 수출시장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화여대 배교수는 “수출 대상국의 소비자가 문화적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느껴서는 안된다”며 “호기심과 신선한 충격을 유도하는 구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질적 요소를 융합한 퓨전패션이 그런 거부감을 덜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예로 배교수는 일본의 이세이 미야케와 하나이 모리에 등의 디자이너들을 국가간 문화적 경계를 효과적으로 극복한 사례로 꼽기도 했다.★ 인터뷰 / 정소영 (주)신원 베스띠벨리 사업부 디자인실장퓨전 진원지는 ‘자기만의 개성 추구’“퓨전현상은 영상매체에 민감한 중·고등학생 등 젊은층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주)신원 베스띠벨리 사업부 정소영 디자인실장의 말이다. 인터넷 등 정보통신의 발달로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해 친숙해졌다는 뜻이다. 정실장은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됨에 따라 문화와 문화간의 벽을 넘어 뒤섞인다”며 “이를 통해 젊은이들은 독특하고 멋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정실장은 또 “자기만의 개성을 연출하고 싶은 신세대일수록 퓨전패션에 대해 빨리 적응한다”고 말했다. 퓨전은 이미 N세대들의 새로운 패션 코드가 됐다는 얘기다.이처럼 퓨전이 N세대의 패션코드가 된 배경으로 정실장은 “젊은층은 특정 브랜드의 컨셉에 무조건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상과 아이템으로 독특하게 변신을 시도하기를 원한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퓨전패션은 창조성을 기본 속성으로 한다는 뜻이다. 정실장은 또 “이제 옷을 ‘받쳐 입는다’는 게 젊은 세대에겐 식상해졌다”며 “옷 뿐만 아니라 헤어스타일, 신발, 액세서리는 물론 메이크 업까지도 퓨전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