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은행연합회관에는 12개 시중은행의 은행장이 한자리에 모였다.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현대건설의 자금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었다.이날 은행장들은 앞으로 만기가 돌아오는 현대건설의 기업어음(CP)과 회사채 대출금은 무조건 만기연장해주기로 합의했다. 시장의 안정을 위해 채권회수라는 눈앞의 이익은 일단 뒤로 미루자는 ‘자율합의’였다.하지만 현대건설의 유동성 문제는 현대건설 자체문제로 빚어졌다기보다는 계열분리와 내부지분싸움 등으로 인해 복합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현대가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데는 넘어가야 할 난관이 많다.◆ 자금난 완화 효과일단 은행장 회의결과에 따라 현대건설은 앞으로 만기가 되는 채권과 대출금은 자동 연장받을 수 있게 됐다. 올해 만기가 되는 현대건설의 여신은 총 2조2천억원이다. 해외차입금을 빼면 약 1조7천억원을 국내 금융회사에 갚아야 한다. 이중 만기연장 대상이 되는 금액은 회사채 5천억원, CP 3천억원, 은행 대출금 3천5백억원 등 약 1조1천5백억원이다. 나머지는 물품대금(진성어음) 7천억원과 종금사가 보유하고 있는 CP 1천억원 등이다. 현대는 이 금액은 자체 자구자금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은행장들은 또 현대건설에 신규자금을 지원하는 문제도 논의했다. 5월 이후 지난 25일까지 각 은행이 현대건설에서 회수한 자금의 50% 범위내에서 자율적으로 지원하자는 내용이다. 은행별 회수금액은 농협이 1천2백50억원, 기업 4백60억원, 하나은행 4백억원이다. 또 조흥 2백10억원, 제일 2백억원, 외환 1백10억원, 서울 1백억원, 한빛 70억원, 대구 50억원, 신한은행 30억원 등으로 파악됐다. 이중 그동안 회수금액이 지원금액보다 많은 농협과 하나 기업은행 등이 자금지원에 나설 계획이다. 농협은 5백50억원을 지원키로 결정한 상태다. 하지만 일부 은행들은 추가지원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어 자금지원이 실제로 이뤄지기까지는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다.◆ 현대그룹의 신뢰 회복이 중요현대건설도 추가자구계획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현대아산 지분중 14.84%를 매각하고 현대중공업 지분 전량(5백26만8천주)을 외환은행에 담보로 맡겨 현금 유동성을 확보키로 했다. 현대건설은 이를 통해 약 1조5천억원 정도의 금액이 유입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하지만 현대그룹의 문제해결은 이제 시작이라는 지적이 많다.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을 조속히 실행해야 하는데 그러기까지는 아직은 멀었다는 시각이다. 부동산이나 유가증권을 매각하는 것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립서비스식 자구계획은 별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현대자동차의 계열분리에 있다. 계열분리가 난항을 겪으면서 내부다툼도 고조되고 있어 현대를 바라보는 외부 시각은 더욱 싸늘해지고 있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현대건설의 유동성부족 문제는 현대그룹의 계열분리 및 지분싸움 등 내부적인 갈등이 복합돼 빚어진 결과”라고 지적했다.금융감독원도 이 과정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금감원은 ‘계열분리 약속을 지키고 문제가 되는 가신그룹을 정리해야한다’는 의견을 외환은행에 전달하면서 현대그룹을 압박하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현대그룹이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은행권의 만기연장으로 발등의 불을 껐지만 골수까지 침투한 고질병을 고치려면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은행장간 자율회의는 현대그룹에 ‘계열분리와 내부갈등 정리’라는 숙제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