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정부가 발표한 굵직한 종합대책 가운데 한 가지의 추진 과정이 궁금해 담당관리에게 물어봤다. 그의 대답이 걸작이어서 실소를 떠뜨린 적이 있다. “별거 아닙니다. 실현 가능성이 낮아요.” 액면 그대로 해석하자면 설익은 사항이 종합대책의 구색갖추기로 들어갔다는 대답이었다.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가. 그 기막힌 사정은 이랬다. 한 정부부처가 20여쪽에 달하는 큰 분량의 종합대책 자료를 각 과(課)에서 취합했다.그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부족한 일부 과가 내놓은 구상단계의 정책이 들어갔다는 설명이다.실현이 요원한 내용이 ‘종합대책’의 하나로 들어간 경우가 아주 예외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종종 의구심이 든다. 양산되는 각종 종합대책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잡다한 내용을 보노라면 사실 그런 것들이 정말 필요해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뭔가 보여주려고’ 거론된 것인지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우선 웬 ‘종합대책’이 그리 많은가. 걸핏하면 ‘종합대책’의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정책이 적지 않다. 지난달 18일 국방부는 기총 사격훈련 중단과 소음피해 감소를 골자로 한 4쪽짜리의 ‘매향리 주민불편 해소를 위한 종합대책’을 내놨다. 건설교통부는 올들어 ‘설계감리 기술력 향상 종합대책’ ‘택시서비스 개선 종합대책’ ‘국토 난개발 방지 종합대책’ 등 종합대책 시리즈(?)를 줄줄이 발표했다. 연내 범정부 차원의 ‘e-비즈니스 육성을 위한 종합대책’도 나올 예정이다. 정부인사들의 기자회견에서는 심심치 않게 “종합대책을 세우겠다”는 말이 나온다.이름은 그냥 ‘대책’이어도 뜯어보면 백화점식의 원세트 정책, 사실상의 종합대책도 태반이다. 재정경제부가 지난달 23일 내놓은 기업자금 안정대책도 관련 사항을 모두 망라하고 있다. △채권형 펀드 활성화 △신축적인 유동성 공급 △추석자금 공급 △신용대출 활성화와 △기업자금사정에 대한 점검 강화 등 굵직한 내용 8가지를 뭉뚱그려 발표했다. 지난 8월말 당정협의를 거쳐 마련한 ‘건설산업활성화방안’은 예산배분, 신규주택구입시 양도세 면제, 공공공사 선금의 적기 지급 등 굵직한 분류로만 세어봐도 27가지나 된다.‘종합대책’을 좋아하는 것은 정부뿐만 아니다. 언론도 그냥 대책이라고 해도 될 것을 걸핏하면 ‘종합대책’으로 쓴다. 보건복지부가 임의·대체조제금지, 의료분쟁법제정 등 의료계의 요구사항을 일부 수용한 ‘종합대책안’을 마련한다고 보도하고 긴급경제장관회의가 열리면 ‘금융시장종합대책’을 토의할 것이라고 전한다. 실제 그런 이름으로 대책이 발표되지 않는데도 말이다.종합대책이 주는 메시지는 이렇다. ‘일단 문제가 터지면 종합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따라서 한꺼번에 온갖 약(대책)을 투여한다. 그러면 증상이 씻은 듯이 없어질 것이다.’과연 종합정책이 그렇게 약발이 있을까. 작년말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후 서울시가 ‘청소년보호종합대책’을 마련했지만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보니 가출청소년을 양지로 돌려보내는 재활프로그램의 효과는 낮은 것으로 지적됐다. 달리 생각해보면 재활프로그램의 효과가 단기간에 높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아니면 평상시에도 당연히 추진해야 할 재활프로그램을 굵직한 사건이 터졌다고 대책의 하나로 발표한게 문제라고 할 수 있다.추석물가안정대책도 마찬가지이다. 내용이야 온갖 게 다 있다. △사과와 배 등 14개 품목의 공급을 대폭 확대 △추석 성수품 수송화물자동차의 특별시와 광역시 도심통행제한 완화 △담합,허위 등 불공정거래 행위의 지도와 단속 강화 △추석분위기에 편승한 개인서비스 요금의 부당 편승 인상 방지에서부터 △9월 신학기를 앞두고 학원 수강료의 안정을 위해 현장지도와 점검활동 전개 등이 그것이다. 엄청난 대책같지만 따지고 보면 일상적으로 정부가 해야 하는 일로 특별히 대책이랄 것도 없다. 더욱이 추석전 물가가 크게 뛴 것을 보면 대책의 실패거나 아니면 이런 행정력으로도 물가잡기에 역부족이라는 반증도 된다.자금시장 안정대책 가운데 단골메뉴인 ‘신용대출 활성화’는 오래된 정책목표이지만 여전히 큰 진전없이 제자리 걸음에 그치는 사항이다. ‘기업자금사정 모니터링’은 정부의 시장 감시 역할로 대책이라고 할지 의문이다.물론 정부가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 일정시점에 터뜨려야 할 총체적이고 긴급한 상황이란 게 있다. 쟁점 사항에 대해 정부가 포괄적인 입장을 밝혀야 할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종합대책이 빈번하게 나온다는 것은 상황 인식에 문제가 있다거나--즉 일상적인 상황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과잉반응을 나타낸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또 ‘종합대책’이 초래할 부작용도 적지 않아 보인다. 첫째, ‘종합대책’에서 예외없이 내놓는 두툼한 자료와 팸플릿이 문제다. 이런 인쇄물이 거저 되는가. 종합대책 자료를 만드느라 관료들이 머리를 쥐어짜고 취합하느라, 또 자료만드느라 시간을 버린다. 관료들의 행정력이 낭비된다. 그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 문제가 있다면 조치는 하나씩 조용히 취하면 되는 것이다. 억지로 종합대책으로 헤딩(?)하려고 하니 별로 실현성없는 대책이 끼이거나 이미 당연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버젓이 종합대책에 넣는 촌극도 벌어진다.종합대책 자료대신 국민과 언론에 알릴 사항이 있다면 장관이나 대변인이 간단하게 메모한 다음 구두로 기자회견을 하면 되지 않을까. 말로 전달한다고 책임있는 관리들의 발언이 무시되지는 않는다. 자료가 없다고 국민들이 정부를 우습게 알지도, 또 기자들이 장관 말을 흘리지도 않는다.둘째, 종합대책은 많으면 수십가지를 하나로 포장하는 바람에 중요한 몇가지외의 다른 사항은 파묻히는 문제가 있다. 언론은 속성상 5가지 이내의 사실만 집중 전달한다. 이보다 많은 사항들은 간략하게 소개되거나 아니면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정말 세부 사항 모두가 알찬 종합대책일 경우 국민들은 결과적으로 종합대책 가운데 상당수의 알아야 할 사항들을 모르고 넘어가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하나씩 국민에게 알리면 더 효과적일 텐데 정책을 한꺼번에 내놓아 소화불량을 걸리게 만드는 것이다.셋째, 종합대책 남발은 정부 부처가 우리도 한건 한다는 식의 언론플레이와 허장성세에 집착할 가능성을 키운다. 그저 ‘한건 했다’는 식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한 경제부처 관리는 “전직 장관중에는 늘 종합대책을 선호하고 그것으로 출세한 사람이 있다”고 지적할 정도이다.어쩌면 기관장과 관료들이 국민들과 임명권자에게 뭔가 보여주려는 충동에 사로잡힐 때 종합대책을 남발하는 것은 아닌지, 수명이 길어야 1년인 단명 장관들이 양산되다보니 경쟁적으로 종합대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먼저 기관장들은 한묶음의 세트 정책을 내놔야 ‘뭔가 한 것 같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종합대책의 과로’에서 하위 관료들을 해방시키고 조용히 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할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무엇보다 ‘종합대책’의 가장 큰 문제는 복잡한 현실을 한꺼번에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는데 있다. 정책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는게 자꾸 드러나면 어쩔 것인가. 국민들을 종합대책의 마취제에서 깨어나게 해야 한다. 정책이란 천천히 하나하나 실천해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줘야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