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는 일본 땅을 처음 밟는 한국인 여행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천황이 살고 있는 황거, 패션의 거리 하라주쿠와 시부야, 번화하기로는 일본 제일이라는 긴자, 그리고 언제나 젊은 인파로 넘쳐나는 신주쿠와 전자상가 아키하바라 등.일본인들의 시각에서만 본다면 아키하바라(秋葉原)는 다른 장소들에 비해 관광자원으로서의 매력이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낮게 평가될 수 있다. 대형 전기, 전자제품상가라는 것을 제외하면 고급, 고품격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그러나 한국인 여행자들, 아니 적어도 전자, 전기 제품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아키하바라’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중심도로를 따라 약 8백m에 걸쳐 2백40여 점포가 늘어서 있는 아키하바라는 일본 전자산업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지도이자 첨단 상품의 진열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하지만 아키하바라에는 전자상가 1번지의 영광과 명예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본경제의 부침과 전자산업의 트렌드 변화에 따라 아키하바라 역시 여러 차례 굴곡을 거쳐 왔다.◆ 90년대 컴퓨터 바람타고 변신 물결80년대 중반에는 욱일승천 기세로 뻗어 가던 일본 경제의 대호황 무드를 타고 고급 가전제품의 특수를 만끽했다. 버블경제가 무너져 내린 직후인 90년대 초반에는 극심한 불황 한파로 점포마다 매출이 뒷걸음질치는 수렁에서 허우적거렸다.90년대 중반쯤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컴퓨터 바람은 아키하바라의 숨통을 터주었으며 94년에는 컴퓨터관련 제품 매출이 가전을 앞지른 역사적(?) 사건이 처음으로 일어났다.아키하바라 상가의 첫출발은 1949년 시작됐다. JR 아키하바라 철도역 한 귀퉁이에 영세 라디오조립상들이 일본정부의 암거래상 단속을 피해 하나 둘 모여든 것이 오늘날 초대형상가의 씨앗이 됐다.그러나 반세기의 세월을 보내고 21세기 로 들어선 지금 아키하바라는 전자, 전기제품 상가의 고정된 이미지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일본의 IT(정보기술)대국 꿈을 받쳐줄 최첨단 거리로 옷을 갈아 입고 있다.아키하바라의 변화를 알려 주는 신호는 상인들의 이야기에서도 감지된다.“버블기의 아키하바라는 중년의 샐러리맨이나 소년들이 고객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여성들, 특히 20대 전후의 젊은 여성고객들로 가게마다 크게 붐비고 있습니다.”대형 가전양판점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한 상인은 여성고객들이 늘어나면서 고객층이 세분화되고 거리도 밝아졌다며 가장 큰 이유로 인터넷과 휴대폰을 꼽았다.철도원들의 귀띔 또한 흥미롭다. JR동일본철도가 발표한 도쿄 수도권 일대의 ‘1일 승차인원 베스트 1백역’ 랭킹에서 아키하바라는 지난 93년 22위에 머물렀었다. 하지만 작년에는 17위로 5단계나 점프 업했다.아키하바라역 관계자는 이같은 순위 변동에 대해 극히 이례적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승차인원이 급증하는 것은 역 주변 지역의 대규모 상업지 개발이나 교통시설 확충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 보통인데 아키하바라에는 수년간 이렇다 할 외적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컴퓨터, 게임기, 휴대폰 등 IT관련 상품을 사기 위해 나오는 젊은 고객들이 아키하바라의 순위를 위로 밀어 올린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아키하바라 상가는 매년 7월 역 앞 광장에서 초대형 인터넷이벤트인 ‘AKIBAK’ 행사를 열고 있다. 이 행사에 올해는 불볕 더위 속에서도 단 4일 동안 16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대혼잡을 빚었다.아키하바라의 한 상인은 “버블이 꺼지자 세간에서는 아키하바라가 이제는 끝났다는 평가가 쏟아졌지만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전기, 전자상가에서 탈피해 첨단 정보통신 메카로 자리매김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으며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상점들만 간판을 내렸을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최신상품 집결지 발돋움 … 비즈니스 열기90년4월 일본 최초의 대형 컴퓨터 전문점으로 문을 연 라옥스의 ‘더 컴퓨터’관은 개점 당시만 해도 무엇으로 8백평 매장을 채울 것인가 속앓이를 하던 점포였다.그러나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과감히 소프트웨어 사업에 뛰어든 이 점포는 라옥스의 달러박스가 됐다. 또 단일점포로도 일본 전역에서 연간 매출이 톱 클래스를 달릴 만큼 확고한 명성과 지지를 구축해 놓고 있다.라옥스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컴퓨터 비즈니스의 장래를 확신하면서 줄곧 아키하바라를 지켜온 ‘소프맵’도 성공케이스의 하나로 꼽힌다.이 회사는 83년 창업당시의 주된 업무가 소프트웨어 렌탈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듬해 중고컴퓨터 판매를 시작한 이 회사는 현재 14호점까지 점포를 늘린데 이어 아키하바라 일대 최대의 컴퓨터상중 하나로 뿌리내렸다. 이 회사의 스즈키 사장은 가전제품이 진열대를 장악한 시절부터 아키하바라를 컴퓨터 비즈니스 거점으로 삼은 이유와 관련, “최신 상품이 가장 먼저 모이는 거리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른 지역보다 집객력이 뛰어난 곳인데다 앞으로도 계속 최첨단을 달릴 상점가로 보고 뿌리를 박은 것이 적중했다는 설명이다.그러나 아키하바라가 첨단 IT상가의 면모를 완벽히 갖추려면 짚고 넘어가야 할 난제가 적지 않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비판론자들은 대규모 상업지역의 경우 오락성과 쾌적성, 그리고 편리성 등 3박자가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아키하바라는 상품력을 제외하면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도로환경도 행인들이 맘놓고 걸어 다닐 수 있게끔 잘 돼 있지 않은데다 안내판, 휴식시설 등 각종 소프트웨어 면에서 첨단 상가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데이코쿠 데이터 뱅크의 아오키 야스유지씨는 “아키하바라의 99년 매출이 98년의 3천9백14억엔보다 5.8% 늘어났지만 IT상품의 수요 급신장에 비추어 본다면 위상은 낮아진 감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IT강국 일본의 꿈을 뒷받침할 아키하바라의 미래에 대해 규쥬규 덴키의 스즈키 사장은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집어내고 있다.“주차장이 확충되고 역사 시설이 이용하기 편리해진다면 아키하바라의 외형은 최고 40% 이상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도쿄도도 이곳을 첨단 IT기지로 육성한다는 의지를 굳혔다. 결국 아키하바라의 장래는 인프라와 소비자들을 곁에 묶어둘 수 있는 운영 소프트웨어에 달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