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약 3년 전 엄청난 경제위기를 겪었다. 당시의 경제상황을 회고해보면 참으로 암울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보여 국가부도에 직면했고 이 상황에서 IMF 긴급구제금융 신청이 불가피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2백만명에 가까운 실업자가 생겨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위기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되살아나고 있다. 경제위기를 경험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대책은 없겠는가.사실 우리나라는 아직도 97년 말에 발생한 경제위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거시경제지표가 위기 때보다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경제성장률이 10%에 가깝고 경상수지 흑자 행진이 이어지고 있는 데다 외환보유고도 9백억달러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러나 97년 경제위기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구조조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99년 이후 거시경제지표가 개선된 것의 실상은 구조조정의 효과라기보다는 98년중 실시한 강력한 긴축정책의 반사효과에다가 환율상승 등의 영향으로 나타난 현상이라는 성격이 짙다.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거시경제지표의 호전을 계기로 경제위기가 끝나고 구조조정을 완료했다고 이해하는 분위기가 한때나마 형성됐다. 그러다가 국제유가의 상승과 같은 예기치 않은 충격이 발생하면서 우리 경제의 허점이 재차 드러나게 됐다. 게다가 그동안 추진해온 구조조정정책이 미진하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우리 경제가 다시 위기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사실 구조조정의 효과는 단 1∼2년만에 나타나기 힘들다. 구조조정이라는 과정이 워낙 복잡하고 불확실성이 많기 때문에 그 성공여부는 불경기가 오거나 외생적 충격을 받아봐야 알 수 있다. 최근 들어 위기감이 다시 확산되는 것 자체가 그동안 추진해온 구조조정정책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한다.그동안 구조조정을 위해 개별 기업차원에서는 인력을 감축하고 조직을 개편했으며 정부에서는 공적 자금을 투입했고 각종 제도를 개선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구조조정의 전부가 아니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각 경제주체들의 불합리한 행위를 고치는 것이고 그 불합리한 행위가 바람직하게 고쳐져야 구조조정이 완료되는 것이다. 97년 경제위기 이후 우리나라가 구조조정을 추진한 본래 취지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즉 개발연대 이래 형성돼온 구습에서 탈피해 세계적 기준에 부합하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형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기업과 금융부문의 부실이 너무 컸고 경제정상화를 위해서는 이를 해소하는 것도 중요했다. 마치 부실 기업과 금융기관의 정리가 구조조정의 핵심인 것처럼 강조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에서 구조조정의 본래 취지가 크게 퇴색했다.구조조정의 취지가 퇴색되면서 구조조정을 위한 개혁의 명분도 약화됐다. 그리고 개혁을 반대하는 저항도 나타나고 구조조정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이에 따라 자연히 구조조정 추진속도도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개혁 초기 모든 사람들이 개혁의 추진을 열망하던 소위 ‘개혁의 밀월시대(honeymoon period)’가 끝나고 말았다.이제는 반대로 불협화음이 갈등의 형태로 표출되는 혼란기에 접어든 느낌마저 든다. 여기에 국제유가 상승이라는 외부충격이 가해지면서 위기감이 대두된 것이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최근의 위기감은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 다시 말해서 97년 경제위기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구조적 비효율 이외에도 조정의 실패(coordination failure)에서 오는 불안감도 상당히 반영하고 있다.한마디로 표현하면 현재의 경제상황은 위기상황은 아니지만 정상적 상태에서 일탈해 위기가 발생하기 쉬운 회색지대(grey zone) 또는 위기지대(crisis zone)에 근접했거나 그 상태에 들어섰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하다.그렇다면 현재의 경제적 난국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결코 간단치 않을 것이다. 또한 그 해법도 여러 관점에서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가 우려하는 경제위기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경제주체가 각자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 특히 강조돼야 한다는 점이다.앞에서 최근의 위기감은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와 조정의 실패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여러 경제주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해당 경제주체가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능동적·적극적으로 경주하는 것이 필수적인 동시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조정의 실패로 인한 불안감이 형성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경제를 보는 것이 경제위기를 실제로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구조조정의 핵심은 그 대상이 되는 각 부문의 경제주체들이 경제체질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경제행위패턴을 변경하는데 있다. 구조조정 이후 현실을 보면 이러한 구조조정의 본래 의미가 제대로 발현되지 않고 있다 하겠다. 가령 정책당국은 기업의 부채비율 인하에 많은 역점을 두었다. 그 본래 의도는 기업의 차입경영풍토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차입금 의존도가 높으면 기업이 외부충격에 노출되기 쉽고 그에 따라 경제위기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자산재평가, 자본금 확대 등을 통해 회계수치상의 부채비율 목표치 달성에 주력했다. 반면 당초 의도한대로 차입경영을 자제하거나 사업규모를 줄이려는 노력은 많지 않았다.문제는 아무리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더라도 그 대상자가 실제로 실행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소를 물가로 끌고 갈 수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의미하는 바와 같다.다음으로 비관적 견해가 확산되는 현상과 관련해서도 각 경제주체들의 합당한 역할이 요청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영향으로 심대한 부정적 효과가 있을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경제위기와 관련해서는 특히 그렇다. 경제위기는 그 사회 구성원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발생할 것으로 생각하면 실제로 발생한다. 이러한 경제위기의 발생 과정을 최근 경제이론에서는 집단행동(herding)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의 경제상황이 위기가 아닌데도 잘못된 판단으로 경제위기가 온다면 그 판단의 외부효과는 얼마나 크겠는가.현재 우리나라 경제상황은 위기로 나아갈지도 모르는 회색지대에 처해 있을 뿐 위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현재의 상황에서 경제위기가 발생할지 여부는 앞으로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경제현실을 무시하고 분위기에 편승해서 경제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 자체가 경제위기를 불러온다는 점에 대해서도 인식을 같이 할 필요가 있다.요컨대 현재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바와 달리 우리나라가 경제위기를 겪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근본적인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경제현실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은 개별 경제주체의 단점을 고치는 계기로 승화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누구의 잘못을 탓할 겨를도 없는 급박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추진하여야 할 구조조정에서는 우리 모두가 추진세력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개별 경제주체가 자신의 체질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스스로 기울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 널리 공감대가 형성되는 새로운 밀월시대가 전개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