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왕가위라는 세 글자는 한 사람의 이름을 넘어서는 ‘무엇’이다. 스텝 프린팅(물체들이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쓰는 기법)이나 현란한 편집 같은 ‘왕가위표’ 기호는 그를 추종하는 많은 신인 감독들의 영화 안에, 뮤직비디오 안에, 광고 안에 등장한다. 하지만 정작 왕가위가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은 이제는 식상할 대로 식상해버린(그래서 그의 이름 자체를 진부하게 만들어버리기까지 하는) 기교가 아니다. 올 칸과 부산영화제의 화제작 <화양연화 designtimesp=20299>는 관객의 기대를 앞질러가는 변화무쌍함이야말로 왕가위의 진짜 가치임을 깨닫게 한다.<화양연화 designtimesp=20302>는 <중경삼림 designtimesp=20303>이나 <타락천사 designtimesp=20304>같은 그의 전작과는 사뭇 그 느낌이 다르다. 60년대 홍콩, 리첸(장만옥)과 차우(양조위)가 우연하게도 같은 날 한 건물로 이사를 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둘은 서로의 배우자들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느덧 가까워진 그들 사이에도 애틋한 감정이 싹튼다. 그럼에도 이들은 항상 지켜야 할 거리를 유지한다.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를 시종일관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리첸은 아름답지만 거북살스러운 의상 안에 갇혀 있고, 좁디 좁은 건물 안에서 두 사람은 머쓱한 태도로 서로를 지나친다. 서로의 배우자들과 마찬가지로 리첸과 차우는 자신들의 어른스러운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마치 18세기 프랑스 사교계 남녀들이 언어 희롱을 즐기듯 그저 표면적인 대화만을 나눌 뿐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데 조차 지극히 인색하다.하지만 두 사람의 감정은 직접적인 사건이나 사랑의 언어가 아닌, 공간에 대한 기억으로 각인된다. 머뭇거리는 리첸의 손이 잡고 있는 문턱이나 황량하기만 한 호텔의 복도는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시간을 현재가 아닌 과거로 기억시킨다. 마치 박제라도 해 놓는 듯 말이다.결국 <화양연화 designtimesp=20311>에는 왕가위 영화를 관통하는 반환 이전 홍콩인들의 불안감, 화려했지만 다시는 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스며 있다. 하지만 이런 아련함은 지금 훨씬 어른스러워진 느낌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뜻한다는 제목만큼, <화양연화 designtimesp=20312>는 인생에서 단 한번뿐이었던 그 시간과 그 공간을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을 보여준다. 왕가위는 지금 그의 영화이력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