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개은행 지점 영업 … 투명성·신뢰 앞세워 소매금융 진출 등 ‘현지화 전략’ 부산

외국 금융기관들의 국내 영업이 본격화하고 있다. 당초 지점이나 사무소를 새로 개설하는 방식으로 국내에 진출하는 것이 주류였으나 최근에는 경영권 인수, 자본참여, 주식시장을 통한 포트폴리오 투자 등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다. 오랫동안 소규모 사업을 전개하며 시장 여건이 형성되기만 기다려온 외국 금융기관들은 ‘때를 만나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국내 시중은행들이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어가는 동안 외국계 은행은 소비자 금융, 기업금융 분야에 효과적으로 파고들었다. 현재 국내에서 영업중인 외국계 은행 지점은 모두 44개로, 99년말 50개에 비해 오히려 줄었다. 파리바은행과 캐나다로얄 은행 등 한국에서 철수한 지점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소규모의 사무소에 해당하는 영업을 하던 곳에 불과하다. 미국계인 씨티은행과 영국계 HSBC은행의 소매 금융 분야 진출은 주목할 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오랫동안 국내 시중은행들에 ‘잠재 위협’이었으나 이제 직접 시장 쟁탈전을 벌이며 부딪치는 상황에 이르렀다.서울 9개, 경기도 성남시 분당1, 부산 2개 등 모두 12개의 지점을 갖고 있는 씨티은행은 올해 중소기업을 상대로 영업하는 미들마켓 공략을 선언하고 나서 시선을 끈다. 항상 ‘은행의 경영목표는 시장 점유율이나 자산규모의 확대가 아니라 수익성’임을 내세우는 외국계 은행이, 위험은 크고 수익은 불확실한 중소기업 대상 영업을 시작한 것은 충격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미들마켓 공략은 외국 은행의 현지화 최종 단계에 해당한다. 씨티는 2004년까지 중소기업 3천개와 주거래 관계를 맺는다는 목표를 세우고 시중은행에서 중소기업 거래 전문가들을 스카우트 하는 등 인원도 보강했다.예수금 기준으로 씨티은행은 6월말 현재 4조 6천9백23억원으로 지난해말 4조9백68억원보다 5천9백55억원이 늘었다. HSBC는 6월말 현재 예수금 잔액이 7천8백6억원으로 지난해 말(5천7백99억 원)에 비해 34.6%(2천7억)나 증가했다. 최근의 환율 불안과 예금 부분보장제 등은 여기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남대문 개인금융센터와 압구정점, 삼성점, 부산점 등 4개 지점에서 영업해온 HSBC는 올해 분당에 새 지점을 낸데 이어 올해 두 곳의 지점을 새로 열고 내년에도 계속 늘릴 계획이다. 이 은행은 지난 4월 주택담보대출 상품을 내놓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예금보장 한도 축소와 맞물려 뭉칫돈이 대거 해외나 외국 금융기관으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여건 조성을 기다리던 이들 은행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영업 강화에 나서고 있어 당분간 이같은 현상은 지속될 전망이다.외국자본의 인수나 지분 참여로 주인과 이름이 바뀐 금융사들도 자리를 잡는 모습이다. H&Q펀드(19.95%)와 투자기관 롬바르드(13.36%)가 대주주인 굿모닝증권은 의사결정을 하는 이사회와 집행을 맡는 경영진을 분리하고, 리서치 센터 인력을 35% 늘리는 등 1년간 집안 정리에 분주했다. 상반기 결산 결과 7백71억원이라는 상대적으로 좋은 실적을 올리는 등 변신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외국 금융기관의 국내 영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은 진출 영역이 다양해지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세계 최대 증권사인 메릴린치증권이 현재 국내에 개설한 지점을 올해 안에 현지법인으로 격상해, 개인대상영업을 대폭 확대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메릴린치는 특히 주로 고액개인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랩어카운트 등 종합적인 자산관리서비스(파이낸셜컨설팅)에 주력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산운용 분야의 영국의 슈로더도 국내 금융시장에 직접 신탁회사를 세워 진출하기 위해 설립 절차를 밟고 있다. 호주 매쿼리은행은 선물 회사를 만들기 위한 신고서를 제출한 상태다.◆ 메릴린치 일반인 대상 증권영업 시작은행이든 증권, 보험이든 업무 영역을 초월해 외국계 금융기관들의 국내 사업 비전은 거의 일치한다. “전세계적으로 금융기관이 통합되는 추세에 맞춰 한국에서도 종합 금융 그룹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같은 움직임에 가장 앞서나가는 곳은 리젠트 그룹으로 지주회사 KOL밑에 종금, 증권, 화재보험 등의 계열사를 갖고 있다. 씨티은행도 지난 5월 지분 1백%를 출자해 국내 벤처기업 투자업무를 담당할 씨티콥 캐피털 코리아를 설립했으며 씨티벤처캐피탈도 국내 법인으로 두고 있다. HSBC도 규모는 작지만 증권과 투자은행 업무에도 진출해 있는 상태며, 최근 보험중개도 시작했다. 이밖에도 주택은행의 지분12.7%를 갖고 있는 ING, 하나은행의 대주주가 된 알리안츠는 동시에 보험업을 영위하고 있다. 생명보험 시장에 우선 진출한 푸르덴셜도 제일투신의 최대주주가 됐고 메리츠증권에도 25.33%의 지분이 들어가 있다. 하나은행측은 “대기업 여신 비중을 줄이고 중소기업과 VIP시장을 개척하는 한편 궁극적으로 상업은행, 투자은행, 자산관리회사, 방카슈랑스, 증권 등을 아우르는 지주회사로 갈 것”이라고 장기 전략을 밝히고 있다.★ 인터뷰 / 존 블랜톤 HSBC한국본부 대표“한국내 비즈니스 규모 확대 한다”HSBC 직원들은 자신의 회사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곧잘 한국시장에서의 역사 이야기를 꺼낸다. “개화기 제물포를 통해 처음 한국에 진출해서…”로 시작하는 이 얘기는 효과 만점이다. 그 긴 세월동안 지켜온 일관성 있는 정책에 감탄을 넘어서 공포감이 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올해초부터 서울본부장으로 일하는 존 블랜톤(48)도 똑같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시종일관(consistent)’과 ‘길게 봐서(long term)’라는 표현을 수차례 되풀이해 사용했다.▶ 보통 상업은행이 외국에 진출할 때는 4단계에 걸쳐 현지화한다고 한다. 정부와 공기업을 상대로 영업하는 것이 첫 단계, 대기업 금융이 둘째 단계, 소매금융이 셋째 단계, 중소기업을 공략하는 ‘미들마켓’이 마지막 단계. HSBC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한국의 경제위기가 곧 지나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98년 소매금융을 시작했다. 긴 안목에서 보면 한국 시장은 전망이 좋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장기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알다시피 올해 주택담보 대출 상품을 내놓으면서 소매금융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중소기업 대상 영업도 이미 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은 편이다. 네번째 단계에 거의 다 왔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지금 개인금융 부문에서 이익이 나지는 않는다. 투자 개념으로 보면 된다.▶ 주택담보대출 상품이 히트, 개인금융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요인이 무엇이라고 분석하는가.무엇보다 상품이 좋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어느 은행보다 낮은 8.5%의 금리를 제시했고 부대비용도 은행이 부담했다. ‘조금 있다가 금리를 올리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고객에게 ‘지속적인’ 이익을 주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그럴 의사가 없다. 질문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다른 은행들이 그런 행태를 보여왔다는 반증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서울은행을 인수하려다 중간에 협상이 결렬됐는데, 여전히 인수를 통한 규모 확장 계획이 있는가.기본적으로, 한국에서의 비즈니스를 더 큰 규모로 확대한다는 방침이 있다. 그래서 좋은 기회가 있다면 한국 금융기관을 추가로 인수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기 계획은.우선 올해 중 2개 지점을 새로 열고, 내년에도 몇 개 더 늘릴 것이다. 새로운 상품도 준비중이며, 인터넷 뱅킹 서비스를 위한 준비 작업도 시작했다. 내년 하반기 쯤에는 서비스가 가능할 것이다.▶ 보험 증권 등과 연계한 은행 상품 출시 계획은.HSBC 자체가 통합 자산관리회사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에 길게 보면 한국본부도 마찬가지 방향을 지향한다. 그러나 일단 한국에서는 연계 상품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규정이 먼저 바뀌어야 하고,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