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아셈빌딩에 자리잡은 '메가박스'극장의자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한시간쯤 지나면 다리가 저려 온다. 두시간 동안 스크린이 아니라 앞사람 뒤통수만 구경하다 나와야 한다. 바닥에는 팝콘 부스러기와 과자 봉지가 널려 있고 어두운 공간 안에는 퀴퀴한 오징어 냄새가 진동한다. ‘극장’이라는 말에 이런 정경을 떠올린다면 최근에 영화보러 가본 적 없는 사람이다. 바야흐로 ‘멀티플렉스’의 시대다.멀티플렉스는 지난 1980년대 세계의 극장들이 비디오 열풍으로 사업이 침체의 길을 걷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대책이다. 스크린 수를 크게 늘려 관객의 선택폭을 넓히고, 쇼핑센터 식당 오락시설 등 부대시설을 함께 운영해 관객을 유인하고 수익원을 다각화하는 것이 핵심 전략이다. 미국을 비롯 일본, 프랑스, 영국, 일본 등 멀티플렉스 극장은 세계적인 추세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상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일찍부터 투자를 해온 제일제당이 구의동 테크노마트에 ‘CGV강변11’을 열면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초기에는 시장 규모가 작은 국내 영화 산업 현실을 감안, 사업성에 대한 의구심도 적지 않았으나 제일제당의 실험이 성공하자 올해 들어 멀티플렉스는 폭발적인 양적 팽창을 보여주고 있다.6개 이상의 상영관이 있는 극장을 멀티플렉스라고 볼 때, 올해 문을 연 멀티플렉스는 아셈컨벤션센터의 메가박스(16개관), 분당 CGV오리(10), 중구 정동 스타식스(7), 동대문 프레야타운의 MMC(10) 등 10여곳이나 된다.제일제당 ‘CGV강변11’ 첫선멀티플렉스가 영화산업에도 ‘규모의 경제’ 효과를 불러오는데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한 사실이다. 일단 관객 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상영관 수가 늘어서 관객 수가 증가하는지 혹은 역의 관계가 성립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양자가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는데 대해서만은 영화가에서 이견이 없다.멀티플렉스 붐은 대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메가박스의 5개월간 운영계산서를 들여다보면 대기업들이 왜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이 극장은 개관 석달만에 관객 1백만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추석 연휴에는 5일간 12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오랜 역사를 가진 종로 서울극장의 8만명을 멀찌감치 따돌렸다.한 상영관에서 다른 상영관으로 영화 프린트가 자동 전달되는 영사시스템을 갖추어 관객 반응이 좋은 영화는 금세 상영관 수를 대폭 늘리는 등 신축적인 운영이 가능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 게다가 멀티플렉스의 수입에서 입장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새발의 피’다. 각종 음식점, 오락실 등 관객의 동선까지 철저히 고려해 설계된 이 거대 소비공간에서 고객이 원스톱 문화쇼핑을 즐기며 쓰는 돈은 엄청나다.메가박스의 주인은 동양그룹이다. 동양은 99년6월 대우에서 DCN을, 중앙일보사에서 캐치원을 인수했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투니버스 바둑TV 등에 이어 영화채널 2개를 확보한 동양은 캐피털 인터내셔널에서 5천만달러 외자를 유치, 미디어 지주회사 온미디어를 설립했고 미국 로스 시네플렉스 인터내셔널로부터 2천만달러 외자를 끌어들여 메가박스를 운영하는 회사인 씨네플렉스도 설립했다.이에 앞서 일본의 모리타와 동양제과가 50대50으로 출자해 미디어플렉스라는 회사도 차렸다. 씨네플렉스는 극장사업에 주력하고 미디어플렉스는 제작 배급 수입 비디오 등 콘텐츠 쪽에 진출한다는 것이 동양의 계획이다.씨네플렉스 김우택 운영본부장은 3년 안에 스크린 1백개를 목표로 한다고 밝힌 바 있으며, 2001년 대구에 10개관짜리 극장을 열고 서울에도 2, 3개를 더 만들 예정이다.강변에 CGV11을 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멀티플렉스를 선보인 제일제당 CJ엔터테인먼트의 행보도 바쁘다. 올해 CGV야탑8, CGV오리11, 부산 CGV서면12 등 모두 3개 멀티플렉스의 문을 새로 열었다. CGV 전국 상영관수는 모두 36개, 좌석수로는 1만5백91석에 이른다. 롯데쇼핑 시네마 사업본부도 백화점 시설과 연계해 복합상영관 사업을 확장하겠다는 계획 아래 일산, 대전, 광주에 롯데시네마를 열었다.엔터테인먼트산업에 뛰어든 대기업이 이렇게 극장사업에 열심인 것은 단지 수익성 때문만은 아니다. ‘극장’을 잡으면 제작·배급·유통 등 영화산업 전반에 대한 지배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공급 초과로 인한 ‘공멸’ 우려도업계에서는 이렇게 멀티플렉스가 빠르게 확산되자 공급 초과로 인한 ‘공멸’의 우려가 나오기도 한다.그러나 아직까지 멀티플렉스는 관객에게 쾌적한 영화 감상 환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또한 관객이 낸 입장료 수입이 영화산업에 고스란히 재투자되는 시스템이 형성된다는 의미에서 특히 산업기반 확충이란 의미도 갖는다.올해 최고 히트작인 <공동경비구역JSA designtimesp=20373>가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작 <쉬리 designtimesp=20374>의 기록을 위협할 정도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이 영화의 제작사 CJ엔터테인먼트계열인 CGV극장들의 힘이었다는 사실은 이같은 ‘산업내 자본 선순환’ 좋은 사례인 것이다.